‘공무원 출신 헤어디자이너’ 정원영 씨는 18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공무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발사로 유명하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노래 한 곡 뽑아도 되겠습니까. 오늘 이발이 잘된 것 같아 절로 노래가 나오네요.”
1987년의 겨울. 막 이발을 마친 중년의 남자가 이발사에게 물었다. 하얗게 밀린 귀밑과 목뒤가 만족스러운지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가며 미소 짓던 참이었다.
“만족하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발사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머리를 정갈히 다듬은 중년의 손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한 뒤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만남은∼우연이∼아니야∼” 손님과 이발사는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오후의 햇살을 건반 삼아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목청껏 불렀다.
노래를 부른 중년의 남자는 당시 조달청장을 맡고 있던 안응모 전 내무부 장관, 이발사는 ‘공무원 출신 헤어디자이너‘ 정원영 씨(64)였다. 정 씨의 별명은 ‘정부 전속 이발사’다. 1970년대 경제기획원 구내 이발소에서 시작해 조달청, 정부세종청사까지 40여 년간 정부 부처를 옮겨 다니며 이발사 생활을 했다.
1984년부터 18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던 그는 누구보다 공무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이발사다. 머리를 깎으며 그와 말을 주고받은 공무원들은 쉽게 ‘무장’ 해제돼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정 씨는 20대 초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가 경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던 아버지의 반대로 이발사로 진로를 바꿨다. 1976년 경제기획원 구내 이발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공무원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1984년 조달청에서 별정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조달청 후생과에서 일할 때에도 그의 ‘이발사 특기’는 유지됐다. ‘명성’을 전해들은 고위 공직자들의 부탁 때문에 업무 틈틈이 구내 이발소로 내려가 ‘원정 이발’을 했다. 조달청과 한 건물에 있던 공정거래위원회뿐 아니라 주변의 서울중앙지검, 대검찰청 고위직들도 그를 찾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 채동욱 전 검찰총장,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머리를 맡겼다.
2002년 공무원을 그만둔 뒤 다시 이발사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해부터는 정부세종청사에 구내 이발소를 열어 또 한번 공무원 전담 이발사가 됐다. 과장, 국장이던 그의 단골손님들은 이제 장관급 고위공직자가 됐다.
정 씨는 “공무원들의 승진과 추락을 지켜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머리가 눌린 모양만 봐도 어제 잠을 뒤척였는지,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알아채 그들과 속내를 나누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변양균 전 대통령 정책실장이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스캔들에 휘말려 뉴스에 오르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그의 기억에 남는 고위 공직자들의 과거 모습은 어떨까.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항상 점잖으세요. 말수가 적은데도 무뚝뚝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호탕하고 아랫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느껴졌어요. 노대래 위원장은 모든 대화에 진심이 담겨서 감동을 주더라고요.”
정 씨는 최근 공무원들의 업무 부담이 지나치게 과중해진 것 같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예전 공무원들은 이발이 끝나면 30분씩 쪽잠을 자고 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뭐가 그리 바쁜지 예약한 시간에 내려와 20분 만에 머리만 후딱 깎고 올라갑니다. 그래서인지 공무원 은퇴한 뒤에 이발기술을 배울 방법이 있는지 묻는 공무원들도 많아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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