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인력-예산 부족… 조선왕조실록 오류 잡으려면 30년은 걸려
이명학 고전번역원 신임 원장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 신임 원장. 그는 “전문 연구인을 위한 번역사업 외에 대중을 위한 고전 번역서 발간과 해외 한국학 연구자를 위한 번역 사업에도 힘쓰겠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도 광해군일기에 비어있는 보름 치 기록에서 출발한 상상력이 빚어 낸 작품 아닙니까? 문화 콘텐츠로서 우리 고전과 기록유산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지요.”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 신임 원장(59·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은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고전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이를 번역, 보급하는 일에는 무심한 현실 얘기부터 꺼냈다.
“얼마 전 방한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경복궁에서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듣고는 ‘단순한 왕조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사회사 아니냐’고 반문했다지 않습니까? 남의 나라 대통령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우리 기록유산들을 정작 우리는 ‘언젠가는 번역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저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이런 자책의 배경에는 번역원 책임으로 진행되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기록유산의 번역 작업이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진도가 더디다는 초조함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번역 속도라면 승정원일기는 93년 뒤에나 완역본이 나와요. 오늘 태어난 아기도 생전에 볼 수 있을지 장담 못할 시간이지요. 한 차례 완역된 조선왕조실록 역시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은 새 번역을 내놓으려면 악착같이 해도 족히 30년은 걸릴 것으로 판단됩니다.”
번역 인력이 130여 명에 불과한 번역원은 이들 기록유산의 번역 작업의 상당량을 국내 대학과 연구소 15곳에 위탁하고 있다.
“번역의 질을 고르고 높게 유지하려면 위탁 기관수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필수 번역 인력을 확보하려면 번역원이 자체 운영하는 고전번역교육원(비학위과정)을 매년 20명 정원 규모의 고전번역대학원(석·박사과정)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봅니다. 허가와 예산권을 가진 교육부와 기획재정부를 적극 설득하려 합니다.”
북한과의 학술 교류 추진 의사도 밝혔다.
“북한은 1970, 80년대 이미 주요 기록유산 번역을 마쳤어요. 남북 학술교류가 우리 측 새 번역으로 북한 쪽 번역 오류를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한문교육학회장을 지낸 이 원장은 현대인이 고전에서 멀어진 이유 중 하나로 부실해진 한자 교육을 지적했다.
“번역원이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고전을 소개하는 노력을 소홀히 한 탓도 크지만, 한자교육을 외면하는 공교육 시스템도 돌아봐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우리말 쓰기, 말하기 능력을 위해서라도 초중학생 때부터 한자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한자를 대하는 시선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7세기 학자 이수광이 중국 베이징에서 류쿠(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사신과 필담을 나눈 기록이 있는데, 필담에 사용한 한자 중 오늘날 필수 교육한자인 1800자를 벗어나는 글자가 없어요. 1800자만 알아도 중국·일본인과 기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죠. 한자를 한자 문명권 시민이 누리는 ‘이점’이자 ‘공동의 언어’로 바라봤으면 합니다.”
번역원 문턱 낮추기에도 힘쓰겠다고 했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족자나 현판, 고문서의 유래나 내용을 몰라 답답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번역원으로 가져오거나 사진을 찍어 e메일(center114@itkc.or.kr)로 보내주시면 전문가가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한문고전 자문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연간 의뢰 건수가 1600건에 달할 정도로 반응이 좋은데, 시민들이 많이 활용할 수 있게끔 더 널리 알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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