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누드와 추상의 하모니 이룬 ‘한국의 피카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0일 03시 00분


‘하모니즘’ 창시자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

음양사상을 기반으로 ‘하모니즘’을 창시한 김흥수 화백. 천부적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삶과 예술을 남기고 떠났다. 동아일보DB
음양사상을 기반으로 ‘하모니즘’을 창시한 김흥수 화백. 천부적 재능과 뜨거운 열정으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삶과 예술을 남기고 떠났다. 동아일보DB
1992년 1월 19일 낮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 화가의 결혼식. 주례는 당시 민자당 김종필 최고위원, 사회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맡았다. 과소비 억제를 위해 정부가 호텔 결혼식을 법으로 금지한 시대라서 나중에 물의를 빚었지만 그보다 이 결혼식이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랑 73세, 신부 30세라는 나이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과 장수현 씨, 둘은 2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 잉꼬부부로 살았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한 ‘하모니즘’의 창시자로, 파격적 인생행보로 주목받은 원로화가 김 화백이 9일 오전 3시 15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유족은 “새벽에 잠깐 깨어나 물을 마신 뒤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함흥고보 시절인 17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고 일본 도쿄예술대에서 공부했다. 1949년 국전에서 누드군상으로 입선했으나 풍기문란으로 그림이 철거되는 논란을 빚었다. 종군화가로 활동한 그는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61년 귀국해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성신여대, 덕성여대 등에서 후학을 길렀고 1998년 예술의 전당에서 ‘김흥수 화백의 꿈나무 교실’을 열어 어린이를 위한 미술교육에 새 장을 열었다.

왕성한 창작과 성에 대한 개방적 사고로 ‘한국의 피카소’라 불렸던 김흥수 화백의 작품.
왕성한 창작과 성에 대한 개방적 사고로 ‘한국의 피카소’라 불렸던 김흥수 화백의 작품.
‘여체가 미의 출발점’이라고 천명한 고인은 여성의 누드와 더불어 불상, 전통춤 같은 한국적 정서를 양대 화두로 삼았다. 그는 단순히 관능적 회화에 머물지 않고 서구 현대미술의 기법과 향토적 감수성을 융합해 독창적 양식을 만들어냈다. 미국에 머물던 시절인 1977년 누드와 기하학적 추상처럼 이질적 요소가 한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즘 예술론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주관과 객관을 합쳐놓은 것이 하모니즘”이라며 동양의 음양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이 창안한 표현양식에 큰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를 토대로 1990년 프랑스 뤽상부르 미술관, 1993년 러시아 푸시킨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2002년에는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기념해 동아일보사와 아사히신문 공동 주최로 모교(도쿄예대)에서 동문인 히라야마 이쿠오 화백과 2인전을 가졌다.

흰 양복에 빨강 셔츠처럼 시선을 끄는 옷차림에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는 예술뿐 아니라 삶에서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1961년 성(性)을 주제로 한 ‘체험론적 여성론’을 연재한 것은 세간의 화제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에 이어 장수현 씨와 8년여 동거 끝에 1992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덕성여대 시절 사제지간으로 만난 사이였다. 아내는 남편을 ‘국보급 화가’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를 ‘예술의 영원한 동반자’로 불렀다.

2012년 장 씨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상심한 노화가. 휠체어에 의지할 만큼 기력이 쇠하고 거동은 불편해졌으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풍산개’를 연출한 외손자 전재홍 감독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으면서도 예술과 자기 관리에 엄격했던 분”이라며 “좋은 예술을 하기 위해선 좋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며 술 담배를 절제하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지금에야 정신이 맑아지고 예술에 대해 좀 알 것 같은데 몸은 이미 노인이 돼버려 너무 아쉽다”고 말했던 고인. 이제 그리던 아내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다. 유족은 3남 1녀.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 발인은 13일 오전. 02-2072-2011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하모니즘#김흥수#누드#불상#전통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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