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저 궁금했을지 모른다. 만일 나를 겁주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했다. 나는 브리핑에 집중했고 동행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즐거운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인 2010년 7월 2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군사정전위원회 건물을 방문했던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사진)은 창문을 통해 자신을 노려보는 북한 병사와의 조우를 이렇게 회고했다. 10일(현지 시간) 발매된 회고록 ‘어려운 결정들’에서 그는 4년 남짓 재임하는 동안 한반도 경험의 일부분을 소개했다.
“비무장지대(DMZ)를 바라보면서 이 좁은 선(군사분계선) 하나가 세상을 극적으로 다르게 갈라놓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가난과 독재에서 번영과 민주주의로 변신한 빛나는 진전의 사례가 됐고 북한은 여전히 공포와 굶주림의 땅이었다.”
회고록에는 북한에 억류됐던 두 미국 여기자, 유나 리와 로라 링을 석방하기 위해 2009년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직접 평양에 보내는 과정도 생생하게 담겼다. 당시 북한은 석방 명분을 찾기 위해 남편의 방문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참모 일부는 이를 반대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일부는 2008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남편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지만 대부분은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동맹국들의 우려를 낳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밀어붙였고 사전 회의에서 남편에게 공식 사진 촬영 때 웃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소개했다. 임무 수행에 성공한 남편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북한인과의 만남을 “마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오디션을 보러 간 것 같았다”고 농담했다고 적었다.
회고록은 북한의 3대 세습 체제에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대화 가능성에 대해선 묘한 여운을 남겼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유야무야된 것은 2001년 집권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전임자인 남편의 정책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자 두 명을 데리고 나온 남편은 ‘우리가 적당한 보상을 제시한다면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는 북한도 긍정적으로 반응한다’고 믿었다”는 대목도 있다.
2012년 5월 중국의 시각장애 인권운동가 천광청(陳光誠) 변호사 망명에 헤럴드 고(고홍주) 당시 국무부 법률고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을, 외교관이던 고 씨의 아버지 고광림 박사가 5·16군사정변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가족사와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했다. 2009년 2월 이화여대 학생들과 나눈 대화도 소개됐다.
한편 클린턴 전 장관은 회고록 출간을 하루 앞둔 9일 ABC방송에 나와 한때 암울했던 재정 상태를 “우리는 백악관을 나오면서 거의 무일푼이었고 빚까지 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우리 부부는 2001년 퇴임 당시 변호사 비용 등 수백만 달러를 빚지고 있었고 주택담보대출(모기지) 비용과 딸(첼시)의 교육비를 대는 데 고생을 했다. 쉽지 않았다”고 했다. AP통신에 따르면 2000년 클린턴 전 장관의 재산신고서에 기록된 자산은 78만∼180만 달러 수준이었다. 반면 남편은 4개의 법률회사에 230만∼1060만 달러의 수임료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답변은 다이앤 소여 앵커가 “2013년 장관 퇴임 뒤 강연료로 500만 달러를 벌었고 남편은 대통령 퇴직 뒤 1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보도를 보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하지만 소여 앵커는 “보통 1회 강연료가 20만 달러라고 들었다. 연봉의 다섯 배를 한 번의 강연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보통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강연하는 것은 공직 생활을 떠난 상당수 인사처럼 대기업이나 특정 단체의 로비스트나 컨설턴트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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