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시신… 노상엔 피… 내 민족을 눈물없이 볼 수 없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5일 03시 00분


6·25전쟁 64주년… 참전용사가 2년간 쓴 일기장 6권 발굴

1951∼1953년 6·25전쟁 당시 한 육군 헌병이 쓴 6권의 일기 원본. 손바닥만 한 노트에 만년필, 볼펜, 연필 등 다양한 필기구로 꼼꼼히 써내려간 이 일기에는 전쟁을 치르는 군인이자 인간으로서 겪었던 고뇌가 가득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51∼1953년 6·25전쟁 당시 한 육군 헌병이 쓴 6권의 일기 원본. 손바닥만 한 노트에 만년필, 볼펜, 연필 등 다양한 필기구로 꼼꼼히 써내려간 이 일기에는 전쟁을 치르는 군인이자 인간으로서 겪었던 고뇌가 가득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어두운 하늘엔 별빛이 떨고 있다. 내 넋 머무를 곳은 어느 별인고. 하늘 바라보며 별빛 우러르니, 깊어가는 밤에 서리 차거웁다. 오랑캐 겨누는 총부리에서 오늘 따라 자꾸만 고향 생각이 피어오른다. 단기 4284년(1951년) 2월 6일.”

올해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64주년. 당시 조국에 삶을 바친 선열이 없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터. 허나 그때 전쟁터를 지킨 대다수는 채 피지도 못한 청춘이었다. 꿈조차 허락되지 않던 전쟁의 포화 아래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전선을 지켰을까. 그 먹먹한 심정을 담은 한 군인의 일기가 반세기를 훌쩍 넘어 우리 곁에 찾아왔다.

1951∼53년 전쟁 당시 한 육군 헌병이 쓴 일기 6권이 23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고서적 수집가인 ‘아트뱅크’의 윤형원 대표(68)가 찾아낸 이 일기는 A4 용지 절반 정도 크기의 누런색 줄 노트에 날짜와 함께 푸른색 잉크와 연필로 쓰였다.

단정한 글씨체로 한글에 한자를 간간이 섞어 쓴 일기에는 20대 젊은이의 끝 모를 울분이 가득했다. 헌병으로 여러 전장을 오갔던 그는 참혹한 광경을 쉴 새 없이 목도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스스로 불행의 함정을 파고 허우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차라리 모든 걸 생각할 줄 모르는 백치가 되고 싶다.”(1951년 9월 23일)

뭣보다 이름도 없이 쓰러져가는 전우에 대한 애상이 곳곳에 차고 넘친다. “○○고지엔 시신이 수없이 방치돼 있었다. 노상을 가득 메운 피. 젊은 인재들이 이렇게 사라졌구나.” “외로운 산골짜기에서 고귀한 생을 초개같이 버린 넋이여, 부디 천상의 낙원에서 고이 쉬시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많은 인명 살상, 막대한 국력의 소비, 회복하기 어려운 현실만 남았다.”

헌병으로 북한군 포로를 자주 상대했던 그는 적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1952년 4월 포로 이송이 끝난 뒤에는 “얼마 전까지도 그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형제가 아닌가. 우리가 죽어도 억울하지만, 적을 죽여도 가슴이 쓰라리다”고 한탄했다. 얼마 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짖으며 총살당한 북한군 앞에선 인생이 덧없기까지 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가. 서로 헐뜯고 죽이는 게 무슨 정의인가. 하늘이 얕은 구름에 가려 마음을 더욱 억누른다.”

1953년 4월 전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절, 그는 문득 오래전 마주친 피란민 가족을 떠올린다. “이제 막 어머니 젖을 뗀 듯싶은 아이. 어디서 목숨을 이어갈지 인생이 가엽다. 허리에 아이를 매단 어미는 나른했고, 앙상히 뼈만 남은 할머니가 곁을 지켰다. 천진하고 난만해야 할 아이가 여름철 파리 떼 모양 쫓겨 가는 길. 한결같이 볕에 그슬린 채 눈은 퀭하니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에게 피란민은 그 숱한 상념에도 이 땅을 지켜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저주스러운 날이다. 어찌 어렵고 가엽고 분한 것이 이것뿐이랴. 내 민족을 통분의 눈물 없이 정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혈액에 도는 피에 온기가 있거든 겨레여 뭉치자. 저들과 우리의 자손을 위하여.”(1952년 6월 25일)

일기는 1953년 늦은 봄, 장교후보생으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며 끝을 맺었다. 고락을 함께하던 전우와 헤어지며, 그는 더욱 피 끓는 자작시 한 편을 남겼다. ‘고난이여/ 노호처럼 달리어 내게로 오라/ 두 팔 벌려 너를 마중하리니/ 고난이여/ 바람처럼 불리어 내게 스미라/ 차분히 머리 들어 너를 반기리니.’

이후 일기 주인공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해 7월 27일, 덜컥 휴전 협정이 성립됐고 그 철조망은 지금도 이 산하의 허리춤을 가른 채 버티고 섰다. 그는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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