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을 때, 왜 밥을 먹는지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그냥 밥 먹으면 배가 든든해 힘이 나는 것 같잖아요. 마찬가지로 일기를 쓰면 마음이 든든했어요.”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저동고 1학년 권상우 군(16)은 쑥스럽게 웃었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동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권 군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매일 쓴 10년간의 일기들을 묶어 ‘상우일기’라는 책을 10일 냈다. 손글씨로 적다가 2007년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블로그에 일기를 올려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았다.
‘좋아’ 대신에 ‘ㅇㅋ’를, ‘슬퍼’ 대신에 ‘ㅜㅜ’를 쓰는 시대. 긴 문장보다는 짧고 함축적인 낱자의 조합이 더 인기를 얻고 있다. 일기를 그렇게 오래 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권 군도 처음에는 글짓기 숙제를 하듯이 일기를 썼다. 어느 날 바람에 머리가 날리자, 마치 자기 몸도 공중에 떠오르는 듯 기분이 좋았다. 그 느낌을 표현할 길을 찾아보다 ‘나도 바람이 된 것 같다’고 적었다. 가슴이 시원했다. 이때부터 일기가 글짓기 숙제가 아닌, 진정한 ‘일기’가 됐다.
일기는 상우에게 복잡한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였다. 2010년 1월 엄마가 뇌경색에 걸려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됐을 때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외갓집에 얹혀 지냈을 때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일기로 풀어썼다. ‘이 세상에 돈이 모두 나뭇잎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남동생의 말을 들었을 때,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하고 일기장에 속마음을 썼다.
일기는 은밀해야 하지 않을까. 블로그에 일기를 올려놓는 이유에 대해 권 군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해 쓴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기가 기적을 일으킨 적도 있다. 2011년 부모님이 모든 것을 쏟아 커피전문점을 차렸다. 그 건물이 10개월 만에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가게가 강제 철거될 운명을 맞았다. 열심히 사는 부모님에게 왜 자꾸 불행이 닥칠까. 슬픔, 분노, 불안을 블로그에 적었다.
철거 예정일, 상우의 사연을 블로그에서 읽은 40여 명이 가게를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억지로 사람들을 내몰 수 없었던 철거반과 건물주는 다시 상우네 가족과 대화를 시작했다.
사실 그의 일기는 소소한 이야기가 더 많다. 용돈 1만 원을 잃어버려 친구와 둘이서 땅바닥만 쳐다보며 필사적으로 찾던 일, 고기를 구워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에서 사랑을 느꼈던 일, 좋아하던 소녀를 멀리서 보다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던 감정…. 평범한 일인데, 읽다 보면 독자는 그 옛날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상우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 세대가 제 책을 읽어줬으면 합니다. 부모님들이 제 일기를 읽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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