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미국 텍사스여자대학교(TWU) 운동과학과 교수(53)는 지난해 말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덕분에 유명 인사가 됐다. 우즈가 새로 영입한 스윙코치 크리스 코모(36)가 권 교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권 교수는 스포츠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운동 역학자로 거듭난 스토리까지 갖고 있다.
그의 학부 전공은 천문학이었다. 어려서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다. 1980년 서울대 자연계열에 입학했다. 당시엔 계열별로 1년 공부한 뒤 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물리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천문학과를 가야 했다. 성적에 따른 결정이었다. 대학 입학 후 “공부를 안 했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 천문학은 딱히 싫지도 않았지만 마음을 확 잡아주지도 못했다.
대학 시절 공부보다는 축구에 빠져 보냈다. 축구 명문 대구 청구고를 다닐 때 늘 응원하러 다녔던 추억 때문에 자연대 축구부에 들어가 공 차는 데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국가대표 공격수 출신 변병주 전 대구 FC 감독과 ‘그라운드의 패셔니스타’ 박경훈 전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이 고교 친구들이다. 거의 매일 축구를 했다. 공을 잘 차진 못했지만 이론과 심판 보는 법에는 능했다. 물리학과 역학을 이용해 공을 멀리, 정확히 차는 데 집중했다. 축구를 논할 땐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2학년 때 체육교육과 개설 교양 축구 수업까지 들었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우연히 체육교육과에 개설된 생체역학이란 과목이 눈에 띄어 신청했다. 수업을 듣자 마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천문학은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지구와 멀리 떨어진 별을 다루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흥미를 붙일 수 없었다. 반면 생체역학에서는 평소 축구를 하며 고민했던 역학적 법칙을 배울 수 있었다. 딱 1주일 동안 수업을 듣고 전공을 바꾸기로 했다. 4학년 때 들은 체육교육과 수업만 26학점에 달했고 체육교육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엔 국내 최고의 운동 역학의 권위자 이긍세 교수(작고)가 있었다. 당시 이 교수는 한국체육과학연구소(현 한국스포츠개발원) 소장을 맡아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권 교수로서는 지도교수인 이 교수가 연구실을 비운 게 큰 행운이었다. 연구실을 혼자 지키며 이 교수가 모아 놓은 모든 역학 책을 탐독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혼자서 이것저것 찾아가면서 책을 읽었지만 밤이 새는 것도 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다른 학생들보다 앞서 갈 수 있었다.”
1985년 석사 논문을 쓸 때 동작분석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작분석은 동작을 영상으로 찍은 뒤 컴퓨터로 동작 하나하나를 역학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이다. 그때까지 국내엔 동작분석 프로그램이 없었다. 해외에는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래서 직접 만들었다. 학부 때 공부했던 포트란(컴퓨터 프로그램 언어)으로 동작분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비록 2차원 분석 프로그램이었지만 국내 최초였다. 그 프로그램으로 1986년 ‘수행 중 누적되는 근 피로가 400m 단거리 달리기의 역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8월 석사장교 입대 전까지 약 4개월간 친분이 있는 교수의 학위논문 분석을 도와주며 3차원 동작분석 프로그램에 대해 공부했다. 석사장교를 마치고 1987년 체육과학연구원에서도 3차원 동작분석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했다. 어느 순간부터 동작분석 프로그램은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1988년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국비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도 영상분석 프로그램을 계속 연구했다. 1991년 3차원 동작분석 프로그램 ‘Kwon 3D’ 첫 번째 버전을 내놓았다. 동작분석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첫걸음을 뗀 시기다.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와 미국을 오가다 2001년부터 TWU에서 교수를 맡으면서 스포츠 동작분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Kwon 3D’를 업그레이드(현재 버전 5 준비 중)하던 중 친구가 주고 간 골프채로 골프에 입문했다. 2008년 골프를 연구하는 제자의 논문 주제잡기를 도와주면서 골프 분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프를 설명하는 이론들에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제대로 연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예를 들어 스윙할 때 클럽이 그리는 궤적을 단면으로 표시해 보여주는 스윙평면(Swing Plane)에 대해 전설적인 골퍼 벤 호건은 ‘공과 어깨선을 연결하는 평면’이라고 했다. 골프 지도자 짐 하디는 ‘골퍼의 뒤쪽에서 봤을 때(홀 반대 방향) 백스윙 정점에서 어깨선과 왼팔이 서로 정렬되는 경우를 단일 평면스윙, 그렇지 않으면 이중 평면스윙’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이런 설명들이 실제 스윙 동작에는 관련이 없다고 보고 있다.
권 교수는 “진정한 스윙평면은 손목을 중심으로 클럽헤드가 톱에서 임팩트, 폴로스루까지 그리는 원운동의 평면이다. 이 평면을 기준으로 스윙 동작의 기울기, 각도 등을 측정한 뒤 골퍼의 비거리, 정확성 등을 분석해 조절할 수 있다. 스윙평면이 나선형이면 불안한 스윙이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2009년 아일랜드 국제운동역학회에 연사로 초청돼 기능적 스윙평면(Functional Swing Plane)을 주제로 한 발표를 했다. 기능적 스윙평면은 임팩트 직전과 임팩트 직후 구간에서 클럽헤드가 그리는 궤적평면인데 이에 따라 구질 등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이때쯤 코모를 만났다. 권 교수는 “어느 날 코모가 학교로 찾아왔다. 골프 연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당시 내가 하고 있는 골프 연구의 실험 대상자도 소개해줬다. 그리고 코모는 2009년 석사과정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현재는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러 지도자에게서 스윙을 배운 코모는 지도자마다 각기 다른 스윙 이론을 설명하자 만족하지 못했다. 운동역학을 통해 스윙의 진짜 원리를 밝혀내려 했다. 권 교수는 “지난 6년 동안 코모의 현장 정보를 바탕으로 연구를 함께해 골프 스윙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아직 퍼즐의 조각들을 맞추고 있는 상황인데 조금씩 맞아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코모와 함께 2편의 소논문도 발표했다. 그러면서 코모도 성장했다. 과거엔 골프 기술만으로 레슨을 했다면 이제는 역학적 원리를 가미해 효율적인 힘의 사용법까지 세세하게 지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즈가 코모를 선택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권 교수는 “우즈에 대한 지도는 전적으로 코모의 몫”이라며 “우즈의 스윙 변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모는 다른 지도자들처럼 이론에 사람을 맞추지 않는다. 코모는 인간 몸의 역학 구조를 잘 이해하고 각 사람에게 맞는 스윙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우즈의 스윙이 짧은 시간에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권 교수와 코모의 만남은 ‘시너지 효과’를 내는 계기가 됐다. ‘권-코모 콤비’가 알려지면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많은 선수가 TWU를 찾고 있다. 권 교수는 2013년부터 프로선수들의 동작을 분석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메이저대회 PGA 챔피언십 우승자 양용은이 그를 찾아왔다. 미국여자프로골프(LGPA)투어에서 활약하는 최나연도 찾아와 조언을 얻고 갔다.
권 교수는 요즘은 시간이 있으면 한국을 방문해 골프 지도자들에게 강연을 해주고 있다. 지난해 말에도 서울과 부산 등을 오가며 골프 지도자들에게 강연했다.
“일부 지도자가 생체역학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의 스윙 이론을 선수에게 끼워 맞추려 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마추어 시절까지 자연스럽고 훌륭한 스윙을 하던 선수가 프로가 돼 비싼 골프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스윙이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특정 이론을 강조하는 스윙은 도그마에 빠져 선수를 다치게 할 위험이 있다.”
골프는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도자가 다리와 허리, 어깨를 꼬아서 내는 힘만을 강조한다. 그것은 역학적으로 잘못된 지도법이다. 우리 몸만으로 힘을 발생시키면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게 권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바른 자세와 힘을 낭비하지 않는 스윙 등도 중요하지만 역학적으로 효율적인 스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골프채를 들고 있는 우리가 외부에서 받을 수 있는 힘은 두 발로 버틴 지면이다. 결국 발로 지면에서 반발력을 얻고 이를 스윙으로 이어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골반이 회전하면서 발이 지면을 차고 거기서 나온 땅의 힘을 원천으로 써야 한다. 체중이동을 하지 않거나 머리를 완전히 고정하거나 골반의 움직임을 제한하면 근육에 무리를 줘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외부에서 얻은 힘으로 스윙 초반에 운동량을 많이 발생시켜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스윙 톱에서 출발해 전체 스윙의 5분의 1도 안되는 구간에서 스윙 스피드를 발생시키고 그 관성을 임팩트 때까지 이어줘야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권 교수는 “많은 주말 골퍼가 임팩트 때 힘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 힘을 주면 그 힘이 100% 우리 몸쪽으로 향하게 돼 있다. 그럼 스윙의 최고 스피드가 폴로스루 때 나온다. 그렇게 되면 임팩트가 정확하지 않고 힘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골프 스윙의 역학적 원리에 대한 교육과정도 만들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역학적 원리부터 단계를 높여가는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역학자의 입장에서 골프의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려고 한다.
권 교수의 골프 핸디캡은 12, 13개. 지난해 말 국내에서 73타를 쳤다. 그는 “연구할 시간을 스윙 연습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골프를 대충 쳤는데 코모가 우즈의 코치가 된 후 내 이름이 알려져 이젠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역학적 원리에 따라 차분히 쳤더니 스코어가 줄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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