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해야 하고, 죽으면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 장례라는 게, 누구나 경황없이 치른다. 그리고 대부분은 대행업체에 맡기기 때문에 사망신고절차를 제대로 기억하는 상주는 드물다.
사정이 그래도 고인(故人)의 뒷정리를 위해서는 사망신고 절차를 밟아야 하고, 신고절차에는 입원했던 병원 의사의 진단서나 사후 검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하는 데는 산부인과나 소아과 의사의 공문서가 필요하지만, 사망 사실을 증명하는 검안서는 의사면허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발급할 수 있다.
일부 의사들, 특히 현역에서 은퇴한 70, 80대의 의사들 중에서 장례업자들이 시키는 대로 검안서를 작성해주고 용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그런 의사들이 시신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해볼 리 만무하다. 그러니 자연사인지 타살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없지 않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서중석 법의관이 2000년 6월 대전의 국과수 중부 분원을 맡은 직후부터 ‘365일 검안’에 매달린 것도 그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법의학 전문의로서 주검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아니 서중석의 철학 이전에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게 법의학의 목표였다.
토요일 일요일이라고 쉴 수 없었다. 죽음에 토요일, 일요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대전 분원장으로 근무하는 5년 5개월 동안 정말 낮이고 밤이고 검안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게 그가 말하는 ‘365일 검안’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건 국과수 중부 분원장 서중석의 개인적인 노력에 불과했다. 2012년 7월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제2대 원장으로 임명된다. 그 사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원’으로 위상이 높아졌다(2010년 8월).
그리고 올해 3월 1일, 서울과학수사연구소는 연구소 주변의 강서, 양천, 구로구를 대상으로 ‘365일 검안’ 서비스를 시작했다. “동료 법의관들 설득에 10여 년이 걸린 셈입니다. 벌써 38건의 시신을 검안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의 정밀부검 결과를 발표한 직후 의료전문지인 ‘청년의사’와 인터뷰를 갖는 자리에서도 이런 말을 했다.
“현재 연간 사망자 수는 대략 26만 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의사 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사망 판단을 할 수 있다 보니 타살인데도 불구하고 자연사로 검안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은퇴한 의사들 중에는 시신을 보지도 않고 사인을 대충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검안이 이뤄지니 통계를 믿을 수 없고 우리나라 변사자 수도 엉터리란 말까지 나옵니다. 이 문제는 적극적으로 자정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의사 사회의 책임입니다. 이번 기회를 빌려 동료 의사들에게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사실 ‘유병언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만 해도 그의 눈엔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선진국처럼 법의학을 공부한 법의관(Medical Examiner)이 시신을 검안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논란이었다.
“그 바람에 경찰과 군 인력이 40일 동안 엉뚱한 곳만 헤집고 다녔습니다. 엄청난 사회적 낭비도 낭비이지만 공권력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병언 전 세모 회장의 시신이 전남 순천시 송치재 인근 매실밭에서 발견된 게 6월 12일. 다음 날 부검을 했고, 치아와 뼈가 광주과학수사연구소에 소포로 배달된 게 그 다음 날인 14일이었다. 하지만 치아와 뼈는 광주에서 할 수 없는 검사였다.
치아와 뼈는 다시 서울로 보내졌고, 서중석 원장의 국과수는 ‘23일 만에’ 치아와 뼈의 주인공이 ‘100% 유병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23일 만’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처리냐고 의아해할지 모른다. 보충설명을 하자면, 뼈에는 세포가 없다. 그래서 세포가 있는 골수를 채취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뼈를 녹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아무리 빨라도 보통 2∼3주가량 걸립니다. 국과수의 종전 관행 같으면 아마 60일에서 최대 90일은 걸렸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빨리 결론을 냈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미 두 달이나 ‘국가적 수색 소동’을 벌인 뒤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법의관이 볼 수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부검실은 법의학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새삼 되새기게 만든 사건이 바로 유병언 변사체 논란이었다.
그는 1957년생이다. 학번으로 치면 75학번이지만 처음 택한 건 공대였다. 그러다 2학년 때 공대를 그만두고 중앙대 의대에 다시 입학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방에서 5년을 근무하면 현역 입영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의대에 들어갔는데 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공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저와 의학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웃으며) 좀 창피하죠?”
그러나 임상 의사가 되는 건 싫었다. 병리학 교수가 되는 코스를 선택했다. 병리학엔 종양, 면역, 법의학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법의학은 미미했다. 그때 국과수에서 법의관을 모집했다. “국과수에서 2, 3년만 근무하면 막강한 병리학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1991년이었다. 물론 몇 년 전 방영된 인기 TV드라마 ‘싸인’의 주인공들처럼 젊고, 멋있는 법의관들이 모인 곳은 아니었다(국과수를 무대로 한 드라마 ‘싸인’의 남자 주인공인 박신양의 실제 모델이 바로 서 원장으로 알려졌다).
첫 부검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1991년 11월 3일, 아주 오래된 부검실에서였다. 목매단 시신이었는데 심한 다툼도 있었다고 했다. 당연히 타살 가능성을 살펴보는 게 부검의 목적이었다. 두개골을 절단-국과수에서는 이걸 ‘거단(鋸斷)’이라고 한다-하는 순간, 정말 비위가 상했다. 대학에서 소아 부검을 50여 차례나 했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후유증이 일주일이나 갔다.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사수 겸 법의학 과장님이 바로 (국립과학연구소 시절 7대 소장을 지낸) 강신몽 소장님이셨는데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열심히 했습니다. 교과서에나 나오는 병명을 직접 사례에 적용시켜보기도 하고…. 그러다 2005년쯤 되니까 외국의 학술 세미나에 나가서 발표를 해도 미국이나 다른 법의학 선진국에 그리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2006년 7월 발생한 서울 서래마을 영아살해 유기사건은 좋은 예다. 사건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고 충격적이어서 국내는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연일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됐다. 그런데 보도가 이상하게 전개됐다.
주변 사람들은 그 집 부인이 임신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면 그렇게 유기할 이유가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제의 부부까지 구체적인 근거를 대며 절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언론은 한국 국과수의 DNA 분석결과가 그렇게 빨리 나온데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프랑스 측은) 우리가 해도 (DNA 분석에) 한 달은 걸릴 텐데 한국이 불과 하루만에 결과를 내놨다는 걸 어떻게 믿겠느냐는 투였습니다. 우리의 유전자 분석 능력을 모르고 그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정도로 얕본 것이죠.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한테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할 수 있느냐?’며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래마을 영아살해 유기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그해 ‘과학수사대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다. 비록 사진과 컴퓨터단층촬영(CT)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시신을 검안했던 일, 금강산 관광 갔다가 피살된 박왕자 씨 사건, 그리고 대구지하철 참사와 삼풍백화점 사건 등은 아직도 서 원장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일들이다.
‘원’으로 승격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원장이 된 이후, 국과수엔 큰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2013년 11월 국과수 본원이 강원도 원주로 이전했다.
아직은 원주 본원에 제대로 된 부검실조차 없지만 과학수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환경변화의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우선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국과수 지원에 적극적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법의학 인력충원도 앞으로 해마다 10명 이상씩 이뤄질 겁니다. 그렇게 80명 이상만 충원되면 우리가 바라는 ‘365일 부검’, 불이 꺼지지 않는 국과수의 미래상도 머지않아 달성될 겁니다. 지금은 국과수를 은퇴한 분들까지 주말에 재능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서 원장은 지난해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4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orld Forensic Festival)’만 생각하면 아직도 흐뭇하다고 했다. 세계 70여 개국이 참가한 과학수사 분야의 올림픽이었다. 세계법과학회, 아시아법과학회, 아시아태평양법의학총회가 이 기간에 함께 열렸고, 1500명이 넘는 전문가가 참가했다. 서 원장은 아시아법과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국의 과학수사 능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는 행사였습니다. 우리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같은 여러 대형 재난을 겪으면서 과학수사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이젠 저개발 국가에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2월 말레이시아의 CSM(Cyber Security Malaysia)과 디지털포렌식 분야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양해각서 체결식에는 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문에 방한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 에원 에빈 과학기술혁신부 장관도 참석했는데 CSM은 특히 우리 국과수의 CCTV 영상 선명화 기법, 얼굴 비교 기법, 동영상 복원 기법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서 원장의 초심(初心)은 ‘호민조판(護民助判·국민을 보호하고, 판단을 돕는다)’이다. ‘유병언 괴담’이 온 나라를 병들게 만들고 있을 때 그동안의 원칙과 관행을 깨고 직접 대국민 브리핑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사기관의 판단을 도울 뿐 감정내용을 직접 밝히는 건 국과수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유병언 괴담’ 때는 조판(助判)보다 호민(護民)이 더 급했다. “호민과 조판이 다른 말이 아니지만, 호민이든 조판이든 현장 중심의 법의학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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