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 송인상 선생의 가심은 곧 대한민국 발전 구축기 주역의 마지막 고별을 뜻한다. 독립 건국과 참혹한 전쟁을 치른 한국의 근대국가 구축 발전기에 ‘경제개발 계획’의 창시자요, 근대 경제제도 도입과 개발정책 추진, 인재 구축의 선구자였던 선생의 발자국은 시간이 갈수록 역사적 평가가 높아질 것이다. 흔히 대한민국의 경제개발계획 시작을 1962년 군사 정부 아래서 시작한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잡고 있으나 이는 큰 역사적 오류이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 근대 경제 성장의 기점을 1962년으로 잡는 오류가 일상화되고 있는 것은 선생이 가신 뒤 더욱 안타깝다.
내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58년 봄 막 언론에 발을 들여 놓은 직후 당시 부흥부(후에 경제기획원)를 출입할 때였다. 장관이었던 선생이 취재 대상이었다. 선생의 강력한 주도로 국가일반예산이 아닌 미국 원조자금으로 산업개발위원회를 창설하고 여기서 경제개발계획 작성에 필수적인 국민총생산(GNP), 생산함수 산정에 필요한 기본 통계부터 정리하고 1차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2년여에 걸쳐 작업했던 계획은 4·19혁명이 나기 3일 전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이때 산업개발위 내에 설치됐던 재정 금융 공업 농업 건설 연구실의 인재들이 그대로 군사정부의 1차 5개년 계획 작성의 주역이요, 그 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인재가 된 것이다.
재무부 장관으로 옮긴 뒤에는 미국 유학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고 재정 금융 정책 운영의 근대화 개혁을 정착시켰다. 아마도 선생께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신 경제개발계획의 종합 추진, 개혁적 인재의 발탁, 원조 제공자인 미국과의 원활한 소통이 없었더라면 한국 경제의 근대화나 ‘한강의 기적’을 낳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로서는 탁월한 혁신개혁이었다. 선생의 온건 침착한 행동거지와 그러면서도 발상과 업무 추진의 혁신성 창의성은 비단 근대경제 정책과 금융 부문뿐 아니라 그가 맡거나 손댔던 한미협회, 국제개발협회, 한국능률협회, 한국경제연구원, 그리고 초대 책임자였던 유럽연합(EU)대사관 수출입은행 등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기자로서, 연구원으로서 일생에 두 번 선생을 모시고 이 나라 근대경제 영역을 같이 호흡했던 필자로서는 1인당 소득 60달러도 못 됐던 대한민국 초기의 그 절박성 혼란상과 오늘 이 시대의 오만함과 ‘세월호’를 만든 전도, 도착 현상을 어찌 정비해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새삼 선생님의 지혜를 구하고 싶다. 부디 하늘에서 이 조국을 굽어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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