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칠 씨(82)의 ‘신분 회복’은 기자에게도 잊지 못할 일이다. 25년간 취재원을 추적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만큼 그가
얻은 결과는 기자에게도 기쁨이다. 게다가 25억 장 중의 한 장이 일으킨 기적 같은 일을 직접 쓴 기사를 통해 목도했으니 지난
33년간 쓴 그 어떤 기사보다도 특별하다.
기자는 1990년 삐라(전단) 발견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이 사건을 보도했다. 김 씨의 끈질긴 노력에 누군가는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면서, 또 정부당국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네 번째 기사는 첫 보도 20년 후인 2010년 역시 6월이었다. ‘광화문에서’라는 칼럼이었는데 그 글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재판에서는 사진 한 장으로 죄를 벗기도 하고 입증되기도 한다. 그게 왜 이 경우에는 안 되는 것인지…. ‘전쟁유물’인 삐라로
‘증명’된 귀순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귀순용사를 전쟁죄수로 전락시킨다면, 글쎄. 전쟁기념관의 6·25유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60주년을 맞은 6·25에 다시 한 번 기대해본다”고.
김성칠 씨와 김영무 씨를 이달 16일
서울 동아일보사에서 다시 만났다. 25년 만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건강해 성칠 씨는 동해에서, 영무 씨는 태안에서
상경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성칠 씨는 “며칠 전 부친 기일에 온 가족이 모였다가 이 공문을 보고 함께 울었다”면서 “하지만 어딘가
귀순증명 기록이 있을 것 같아 찾는 걸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영무 씨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느낀다. 진실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 운명의 삐라는 현재 국방부에 보관돼 있다. 》
‘25억 분의 1.’ 그렇다. 1990년 6월 26일 김성칠 씨에게 건네진 사진의 저 삐라는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우연의 소산이다. 6·25전쟁 중 북한 상공에 살포된 25억 장의 귀순권유 전단 중 한 장. 그런데 거기엔 1952년 1월 14일 강원도 양구의 김일성고지에서 총알이 빗발치던 사선을 뚫고 남쪽으로 귀순한 인민군 네 명의 기념사진이 들어 있다. 김 씨는 그중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귀순 직후 촬영한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지만. 그 사진으로 제작한 삐라 역시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삐라가 난데없이 38년 만(1990년 6월)에 실체를 드러낸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우연이 어떻게 가능할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건 분명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래서 이후 25년이나 이어진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다. 포로가 아니라 귀순자로 자신의 신분을 회복할 명백한 증거를 하늘이 보내주었으므로.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 지극한 우연. 자초지종은 이렇다. 때는 1990년 6월, 6·25전쟁 발발 40주년을 며칠 앞둔 초여름이었다. 김 씨는 서울 동아일보의 편집국을 찾아와 사연을 털어놓았다. 전쟁 중 인민군 2군단 27사단 32연대 소속 연락장교로 1952년 1월 14일 김일성고지에서 동료 네 명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온 귀순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석 달쯤 후 서울 영등포의 한 미군부대로 옮겨졌고 거기서 정탐 임무를 부여받고 당시 통제 불능상태에 빠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투입됐다고 했다. 미군 제안을 수락한 자의적 결정이었다.
그러다 며칠 후 가짜 포로임이 발각돼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집단린치를 당했다고 한다. 인민군 포로들은 정신을 잃은 김 씨를 죽은 줄 알고 쓰레기 더미에 버렸다. 그는 일주일 만에 깨어났는데 포로수용소 관리를 맡은 중립국감독위원회 구역의 병원이었다. 그는 사연을 설명하며 자신을 파견한 미군에게 연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없어 광주(光州)의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귀순자 신분이 포로로 뒤바뀐 것은 바로 그때. 그런 와중에 포로수용소를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해 6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내린 ‘반공포로 석방’ 지시 덕이었다. 그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수용소를 나왔다. 하지만 신분은 귀순자가 아니라 ‘반공포로’인 채로.
김 씨는 이런 억울함을 1960년대부터 근 30년간 정부와 미군에 호소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느 기관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이유는 늘 같았다. ‘기록이 없다’였다. 그러다 동아일보를 찾았는데 그를 만난 게 당시 국방부를 담당하고 있던 기자다. 기자는 김 씨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그래서 ‘인민군포로 오명 38년, 보상 길 없는 인생낙인’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고 이 기사는 6·25전쟁 발발 40주년을 맞기 하루 전인 1990년 6월 24일자 사회면에 보도됐다. 그때 기자는 이 기사를 읽은 이 중 누군가가 어딘가 남아 있을 기록을 찾아 도와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며칠 후 수원의 독자 김영무 씨(현재 84세)가 문제의 삐라를 갖고 있다고 알려온 것이다. 기자는 김 씨와 함께 이튿날 수원으로 가 영무 씨를 만났다. 그날 삐라를 건네받고 그 속에서 자기 모습을 확인한 성칠 씨가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감격에 앞서 안타까움에 목 놓아 울었다. 그 삐라 때문에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를 고향 황해도의 부모님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10대 독자였다. 부모님과 누이를 남겨둔 채 인민군에 끌려가 중국 지린 성 선양의 팔로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연락장교로 임관됐다.
어찌됐든 이 삐라는 김 씨에게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회복시켜 줄 결정적인 증거였으니. 기자에게도 큰 뉴스였다. 하늘에 살포한 25억 장 삐라 가운데서 김 씨의 사진이 들어있는 삐라를 38년 만에 찾은 것만 해도 훌륭한 기삿거리였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리는 두 번째 기사를 썼다. 첫 기사를 보도한 지 일주일 뒤인 1990년 7월 1일자 사회면에 ‘포로누명 벗길 빛바랜 전단’이란 제목의 두 번째 기사가 실렸다.
두 번째 기사엔 삐라를 찾아준 김영무 씨의 사연을 추가했다. 우연찮게도 김영무 씨와 김성칠 씨는 모두 황해도에서 내려온 월남민이었다. 처음 만난 두 김 씨는 고향을 묻더니 ‘100리(40km)도 안 되는 지척’이라며 반가워했다. 영무 씨는 1·4후퇴 때 월남해 곧바로 국군에 입대했고 육군본부 심리전실에 배속됐다가 얼마 후 ‘유엔의 소리’에 파견됐다. ‘유엔의 소리’는 대북 선무공작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영무 씨는 서울 여의도비행장에서 매일 북한과 지리산 공비출몰지역으로 출격하던 C-47 수송기에 탑승해 비행기 문밖으로 삐라 더미를 뿌리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언젠가는 이렇게 흔한 삐라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그래서 그날부터 한 장 한 장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게 300여 장. 그건 지금도 스크랩북 두 권에 고이 담겨져 있다. 동아일보의 첫 기사를 읽던 중 혹시나 해서 뒤지기 시작했는데 성칠 씨가 들어있는 삐라를 발견하고 곧바로 연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김 씨의 기대와 기자의 희망은 허사였다. 귀순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것으로 믿었던 삐라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삐라를 첨부해서 정정해 달라고 요청해도 대답은 번번이 ‘불가(不可)’였다. 역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중에 국방부에 알아보니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인민군 귀순자라고 삐라에 소개된 사람의 상당수가 조작되거나 연출된 민간인이었다는 것이 국방부의 귀띔이었다. 그런 마당에 김 씨가 귀순했음을 증명하는 분명한 문서나 기록이 없는 한 김 씨를 그의 주장만 듣고 귀순자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던 미군은 인민군에 관한 한 체포, 투항, 귀순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전쟁포로(PW·Prisoner of War)’로 기록했다.
그런데 며칠 전 대반전이 일어났다. 국방부가 김성칠 씨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한다’는 서류를 김 씨에게 보낸 것이었다. 민원을 제기한 지 근 63년 만에 처음 받아본 긍정적인 회신이었다. 서류의 제목은 ‘참전사실 확인 심의위원회 확인서 발급 안내’. 국가유공자로 지정됐으니 보훈처에 등록하라는 안내공문이다. 지난해 1월 ‘국민신문고(www.epeople.go.kr)’에 낸 탄원에 대한 ‘민원회신’이었다. 기자는 이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우회적이긴 하지만, 마침내 정부가 그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비록 서류 어느 대목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한 것은 서류에 적시된 ‘비(非) 군인으로 참전’이란 문구 때문이다.
‘비 군인으로 참전’이란 그가 귀순 직후 52년 1월부터 8개월간 미 10군단 심리전대에서 ‘삐라 모델’로 활동한 것을 지칭한다. 국방부는 최근 정보사령부를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했고 심사위원회는 그걸 토대로 김 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걸 기자가 김 씨에 대한 ‘귀순증명’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포로란 총부리를 겨눈 적이다. 따라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유공자로 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는 그런 ‘포로’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그 배경은 이렇게 볼 수 있다. 삐라라는 너무도 명백한 실체적 증거를 무시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김 씨의 귀순경위는 그 삐라가 발견되기 전 이미 공개됐다. 그리고 보도를 계기로 발견된 삐라는 그 주장이 진실임을 확인시켜 줬다. 그러니 삐라와 객관적 보도를 통해 김 씨의 귀순사실은 이미 증명됐고 정부도 더이상 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본다. 동시에 정부 측에도 김 씨의 억울함에 동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공식기록이 없어 신분을 회복시켜 줄 수는 없지만,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그런 효과를 낼 조치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고육지책으로 보이는 ‘국가유공자 지정’이다.
기자는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분 회복’으로 풀이할 수 있는 여러 함의(含意)를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어쩌면 우리정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조치는 김 씨가 포로석방 직후부터 자구노력을 시작한 지 63년 만에, 동아일보가 첫 보도를 한 지 25년 만의 결실이어서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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