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을 맞은 딸기 향이 가득한 충남 논산시의 양촌영농조합. 백발성성한 촌로가 다 된 ‘밤나무 검사’ 송종의 전 법제처장(74)이 19일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지난해 6월 자신이 세운 공익법인 ‘천고(天古)법치문화재단’의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이 열린 지 일주일 만이었다.
“국민은 꼭 사자와 같아서 절대 칭찬하는 법이 없어요. 검찰이나 공권력이 잘하면 가만히 있지만 잘못하면 물어버리거든요. 법치주의 확립에 힘쓰는 공직자들에게 국가가 훈장 주듯 칭찬해주고 싶어서 만든 상입니다.”
1969년 임용된 뒤 27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송 전 처장은 논산으로 내려갔다. 평검사부터 1993년 사정정국 당시 슬롯머신업계 비리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서울지검장, 윗사람에게 꼿꼿하게 직언하는 대검 차장, 그리고 법제처장에 이르기까지 사무실 한 곳에 곱게 놓인 명패 13개가 그가 살아온 궤적을 일러줬다.
명패를 보다 질문을 하나 건넸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홍준표 경남지사와 수사를 지휘하는 김진태 검찰총장에 대해서다. 송 전 처장은 “만감이 교차한다”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서울지검장 시절 매일 얼굴 맞대고 함께 일한 아끼는 후배 검사들입니다. 김 총장은 조용하고 진중한 선비예요. 내가 참 아껴요. 그런데 한 명은 피의자 신분으로, 한 명은 검찰총장으로 수사에 얽히니 내가 어떻겠어요. 이게 무슨 드라마인가 싶습니다. 참 안타깝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전관 변호사’의 길을 마다하고 밤과 딸기 등 과실 가공으로 모은 8억5000만 원을 출연해 재단을 세우고 매년 포상 계획을 공언했다. 법조계에선 “과연 송종의답다”란 평이 나왔다. 재단 이름인 ‘천고’는 송 전 처장 내외의 법명에서 따왔다. 1996년 사고로 스무 살 된 아들을 잃고 방황하던 중 부산의 한 절에 머물렀다가 얻은 법명이 ‘천목(天目)’과 ‘고불법(古佛法)’이었다.
12일 시상식에는 내로라하는 전직 장관급 인사만 20명을 포함해 송 전 처장과 뜻을 같이하는 전·현직 검찰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다. 제1회 천고법치문화상은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과 법무부 위헌정당 태스크포스(TF팀장 정점식 검사장), 경찰청 생활안전국(국장 조희현 치안감)에 돌아갔다. 수상자 선정 이유를 한참 설명하던 송 전 처장은 특히 법무부 위헌정당 TF에 대한 애정을 각별히 드러냈다. 그는 “정권에 부담도 될 테고 검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해내 감격스러웠다”고 밝혔다. 법전 하나 없이 불교서적 등만 가득한 재단 사무실 책장 한 곳에 법무부의 위헌정당 백서가 자리를 메운 건 그 때문인 듯했다.
송 전 처장은 “나는 참 부지런하고 번잡한 사람이오” 하며 손수 만든 프레젠테이션을 시연했다.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왜 내려왔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어 직접 사진을 찍고 배경음악을 입혀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베트남에서 법무관을 마치고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고국의 민둥산을 바라보며 나무를 심겠다고 결심한 뒤 1971년 강경지청 검사 시절부터 국유지를 임차해 밤나무를 심었다. 저장창고를 만들고 주말마다 찾아와 가꾼 게 직접 세운 양촌영농조합의 시초다. 매년 밤과 딸기를 수확하고 가공해 잼을 만드는 업체에 납품하거나 수출하는데 연 매출이 100억 원에 이른다.
공직을 떠난 지 올해로 만 17년이지만 ‘홍안의 송 검사’ 특유의 꼿꼿함과 검찰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사정정국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후배 검사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는 물음에 “명예”라는 답이 돌아왔다. “검사는 모름지기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명예가 생명보다 중요하죠”라던 그는 “사(私)심뿐 아니라 사(詐)심 없이 수사하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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