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학도병 출신 박태환 옹
“미군 배치돼 목숨 걸고 싸웠는데… 외국정부 무공훈장 받으면
국가 유공자로 인정 못해준다니…”
노인은 구부정한 자세로 빛바랜 훈장을 어루만졌다. 말을 더듬었고 귀도 안 들리는지 번번이 질문을 되물었다. 하지만 기억은 놀라울 만큼 생생했다. “1950년 8월 16일이었지. 그때 대구 계성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자고 있는데 누가 깨우더니 갑자기 군대를 가라더군. 키가 작아서 소총을 어깨에 멨더니 개머리판이 땅에 닿을 정도였어….”
6·25전쟁 발발 6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부산 수영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박태환 씨(84)를 만났다. 박 씨는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형식적으론 지원이었지만 사실상 징집이었다. 그런데 국군이 아닌 미군 3사단에 배치됐다. “그때 듣기로는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해서 나처럼 여러 명이 미군에 배치됐다고 하더라고.”
박 씨는 일본에 있던 미군 훈련장에서 한 달간 사격 훈련을 받은 뒤 전장에 투입됐다. 첫 전투가 1950년 10월 2일 개시된 원산상륙작전이었다. 원산 상륙에 성공한 뒤 미군 3사단은 함흥과 철원 등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 철원 김화지구 전투에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는 “적진을 향해 진격하다가 앞장섰던 소대가 전멸하는 걸 봤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3월 미군은 박 씨의 공로를 인정해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제대했다.
비록 국군이 아닌 미군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섰지만 박 씨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국가유공자 지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을 빚으며 그의 자부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박 씨가 처음 국가보훈처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87년. 훈장과 복무사실기록 등을 근거로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거절했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외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은 경우는 국가유공자 등록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또는 보국훈장을 수여 받아야 국가유공자 등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 씨는 지금까지 거의 매년 보훈처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해마다 똑같은 답변만 듣고 있다.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5월 미국 정부로부터 당시 훈장을 수여했다는 증서까지 받았는데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6월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 잠을 설친다. 박 씨는 “다른 유공자들처럼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미군에 배치됐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강에 뛰어들어야 국가가 내 심정을 알아줄까 수백 번 고민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다음 달 중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해 억울함을 털어놓을 생각이다. 박 씨는 “미군이 내게 왜 훈장을 줬는지 그 이유를 우리 정부에 설명해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라며 울먹거렸다.
박 씨는 부인(80)과 함께 30m²도 안 되는 월세 15만 원짜리 집에서 살고 있다. 낮에는 부부가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아들들은 사업 실패 등의 이유로 20년 전부터 소식이 끊겼다. 출가한 딸에게 경제력이 있다는 이유로 부부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정부 지원은 노인연금 등 월 30만 원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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