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 붉은 증서에 새긴 광복군 부부의 결혼서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3일 03시 00분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씨 딸 박천민씨 가보 2129점 기증

박천민 씨의 할아버지 박찬익 씨(뒷줄 오른쪽)가 1940년 백범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 부부(앞줄 양쪽) 등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3년 박 씨 부모의 결혼 증서로 ‘임시정부가 최초로 발행했고 김구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박천민 씨의 할아버지 박찬익 씨(뒷줄 오른쪽)가 1940년 백범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 부부(앞줄 양쪽) 등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3년 박 씨 부모의 결혼 증서로 ‘임시정부가 최초로 발행했고 김구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1970년 2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 불이 활활 타는 2층 단독주택 앞에 박천민 씨(60·여)가 서 있었다. 당시 박 씨의 나이는 17세. 그의 어머니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1층에서 궤짝 두 개를 끌고 나왔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너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이걸 지켜라. 이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보란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불이 꺼질 때까지 꼼짝 않고 궤짝을 지켰다. 교복과 책이 불에 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뒤 불은 꺼졌지만 2층은 모두 타버렸고 1층은 물바다가 됐다. 일주일 뒤 박 씨는 중학교 졸업식에 사복을 입고 갔다. 그 대신 그가 지켰던 궤짝은 무사했다.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지방을 돌아다니던 박 씨가 잊고 있던 궤짝 앞에 다시 선 것은 50대 후반 무렵. 노환으로 몸이 편찮아진 어머니가 그에게 가보를 맡긴 것이다. 6·25전쟁 때 어머니가 궤짝 속 물건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켰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궤짝을 열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을 누볐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한 아름 쏟아졌다. 박 씨의 아버지 남정 박영준(1915∼2000)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박 씨의 어머니 신순호(1922∼2009)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신규식의 조카이자 광복군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박 씨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남파 박찬익(1884∼1949)이다.

200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뒤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 씨는 궤짝 속 자료를 비롯해 부모의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박 씨가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는 2129점에 달한다.

기증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박영준과 신순호의 붉은색 결혼증서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부부를 맺고…’로 시작하는 증서에는 ‘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결혼식은 1943년 12월 12일 중국 충칭 우스예항 임시정부 청사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강당은 독립운동가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는 한국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신부가 입은 중국식 전통 의상 치파오도 기증됐다. 이 밖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사진, 단군 영정, 광복군 훈련 사진 등 다양한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박 씨가 기증한 자료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주제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박 씨의 가족사 자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 자체”라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국사 교사를 지냈던 박 씨는 “어머니는 과거 중국에서 학교 다닐 때 중국인들로부터 ‘망국노’라고 불린 것을 내내 가슴 아파했다”며 “그 말을 다시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구#조소앙#박영준#신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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