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민 씨의 할아버지 박찬익 씨(뒷줄 오른쪽)가 1940년 백범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 부부(앞줄 양쪽) 등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3년 박 씨 부모의 결혼 증서로 ‘임시정부가 최초로 발행했고 김구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1970년 2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 불이 활활 타는 2층 단독주택 앞에 박천민 씨(60·여)가 서 있었다. 당시 박 씨의 나이는 17세. 그의 어머니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1층에서 궤짝 두 개를 끌고 나왔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너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이걸 지켜라. 이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보란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불이 꺼질 때까지 꼼짝 않고 궤짝을 지켰다. 교복과 책이 불에 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뒤 불은 꺼졌지만 2층은 모두 타버렸고 1층은 물바다가 됐다. 일주일 뒤 박 씨는 중학교 졸업식에 사복을 입고 갔다. 그 대신 그가 지켰던 궤짝은 무사했다.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지방을 돌아다니던 박 씨가 잊고 있던 궤짝 앞에 다시 선 것은 50대 후반 무렵. 노환으로 몸이 편찮아진 어머니가 그에게 가보를 맡긴 것이다. 6·25전쟁 때 어머니가 궤짝 속 물건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켰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궤짝을 열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을 누볐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한 아름 쏟아졌다. 박 씨의 아버지 남정 박영준(1915∼2000)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박 씨의 어머니 신순호(1922∼2009)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신규식의 조카이자 광복군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박 씨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남파 박찬익(1884∼1949)이다.
200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뒤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 씨는 궤짝 속 자료를 비롯해 부모의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박 씨가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는 2129점에 달한다.
기증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박영준과 신순호의 붉은색 결혼증서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부부를 맺고…’로 시작하는 증서에는 ‘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결혼식은 1943년 12월 12일 중국 충칭 우스예항 임시정부 청사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강당은 독립운동가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는 한국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신부가 입은 중국식 전통 의상 치파오도 기증됐다. 이 밖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사진, 단군 영정, 광복군 훈련 사진 등 다양한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박 씨가 기증한 자료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주제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박 씨의 가족사 자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 자체”라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국사 교사를 지냈던 박 씨는 “어머니는 과거 중국에서 학교 다닐 때 중국인들로부터 ‘망국노’라고 불린 것을 내내 가슴 아파했다”며 “그 말을 다시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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