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실 한편으론 그랬어요. (내가) 노래 더 할 수 있나? 음악 더 할 수 있나? 더 해야 하나?…”
고지가 눈앞이었다. 앞서 누군가로부터 ‘한영애가 가수 인생을 정리하고 은퇴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성북구 선잠로의 한 음식점으로 그를 만나러 간 건 한 중견 가수의 은퇴 고백을 생생하게 독점 취재할 것 같다는, 그런 못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40주년이라…. 내 나이도 마흔셋 돼서야 처음 인지한 괴팍한 사람이 난데. 데뷔 몇 주년 이런 거 챙겨본 적 없었거든요. 그래도 스스로 주는 조그만 상장 정도로 생각하고 40주년 콘서트를 준비하는데…. 온 거예요. 르네상스랄까…. ‘대중과 더 나눌 게 있지 않나.’ 먼 훗날에 ‘그때 정말 빛나는 날들이었지’ 할 수 있는 것들이…. …은퇴. 그거 안 해요! 절대로 안 해요!”
뉴스란 선혈에 목마른 기자는 한영애의 입술이 ‘은퇴’란 두 글자를 진묵처럼 뱉어내기만을 사악하게 바랐건만. 근데.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도 영 아니었던 것이다.
머리에 꽃을 꽂으라고요? TV는 불편한 곳이군요
일단 한영애는 다음 달 9일 오후 7시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 ‘꿈 인 꿈’을 연다고 했다(7만7000∼9만9000원, 02-549-5520). 세월이 꿈만 같아서 ‘꿈 인 꿈’. 무대엔 신석철(드럼) 조연호(일렉트로닉스) 이성열(기타) 김정욱(베이스) 박용준(건반) 같은 일류 연주자들과 현대무용수 두 명이 투입된다. 오랜 음악 동료이자 선후배인 엄인호 이정선 김종진까지 초대 손님으로 나온다.
‘노 은퇴.’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뭔가 역사를 포괄하는 공연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아직 공연 곡목을 정하지 않았다”는 그와 함께 그의 역사를 더듬는 수밖에.
한영애는 1976년 포크 그룹 ‘해바라기’ 멤버로 음악을 시작했다. 지금은 이주호 유익종 듀오로 더 유명한 해바라기는 초기에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의 4인 편제였다. 한영애가 그간 별반 TV 출연을 하지 않고 반골 기질을 발휘한 건 바로 이때의 트라우마 탓이다.
“해바라기 1집(1977년) 내고 TV에 나갔는데, PD가 ‘여자 멤버들은 머리에 꽃을 꽂으라’는 거예요. 생머리로 하고 싶은데. 김영미 씨는 꽃을 꽂기 싫다며 울었죠. 정선 오빠한테 ‘이깟 TV 출연 안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이건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더라고요. 그때 인식이 박혔어요. ‘TV란 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구나. 참으로 불편한 곳이구나.’”
한영애는 해바라기 탈퇴 후 자유를 찾다 아예 노래판을 떠났고 연극계에 투신했다. 극단 이름도 마침 ‘자유’. “6∼7년 극단 생활은 제 음악 인생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에요. 무대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고 흔들 수 있는지를 익혔죠. 음악을 3차원으로 보고 음의 뒤까지 만질 수 있게 해줬어요.”
그룹과 극단 활동을 했지만 한영애는 사회성과는 거리가 먼 가수다. ‘한창 활동시기에 돌연 산으로 잠적했다’든가 ‘연락두절’이 그를 둘러싼 가요계의 주된 평이었다. “번잡한 걸 싫어하니까.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들끓는 욕망들이 무서우니까.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이 제게 얼마나 많은 애정을 주었는가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네….”
어쨌든 음악에 대한 갈증 앞에 두 손 든 채 극장의 먼지를 털고, 한영애는 1986년 ‘여울목’(작사 작곡 한돌)이 담긴 1집을 통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솔로 가수였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이 외침이 얼마나 절실해요?”
스스로 개울로 표현하는 한영애의 음악 인생에 물꼬를 튼 노래는 말 그대로 흐르는 물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1집에서 주목받은 ‘여울목’과 ‘건널 수 없는 강’(작사 작곡 이정선). “대중의 기호를 처음 생각하게 됐죠. 늘 낯선 것,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을 좋아하나 하는 생각요.”
한영애는 가요사의 명반으로 꼽히는 1988년 2집 ‘바라본다’부터 이후 모든 앨범과 콘서트의 기획을 직접 맡았다. 이때부터 창법과 음성에서 자기 방식이 속 시원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연극판에 ‘노래는 말하듯 하고, 대사는 노래하듯 하라’는 격언이 있어요. 음 하나하나에 전부 공간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노래한 것 같지 않아요. ‘누구 없소?’(작사 작곡 윤명운)는 도전이었어요. 스토리텔링이 어렵잖아요. 결론은 ‘트로트처럼 흐드러져 버려야겠구나’였죠. 연극적 어조와 트로트 감성의 결합?!”
기괴하고 코믹한 ‘코뿔소’(작사 작곡 이승희), 비비 킹(1925∼2015)의 기타에 붙은 별칭을 블루스로 풀어낸 ‘루씰’(작사 한영애, 작곡 엄인호) 역시 사랑받았다. 한영애는 노래의 진한 맛을 기타리스트들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1970년대 화이트(백인) 블루스 뮤지션들을 많이 좋아했어요. 화이트는 아니지만 존 리 후커, 비비 킹도 엄청나게 팠고요. 그리고 로이 뷰캐넌과 제프 벡 선생. 전기기타의 비브라토(떨기)와 와와(wah-wah·강조 주파수 대역을 조절해 ‘와우와우’ 하는 소리를 내는 전자장비), 피드백(feedback·전기기타와 앰프 사이의 맥놀이 현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한영애의 초기 작곡가 목록엔 김수철, 엄인호, 이정선, 한돌 외에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도 들어갈 뻔했다. “종진이가 서너 곡 들고 와서 들려주는데 다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노래에서 가수가 할 부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죠. 그게 나중에 봄여름가을겨울이 불러 히트한 ‘어떤 이의 꿈’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예요. 종진이가 나중에 그러더군요. ‘누나, 그때 그거 누나가 했으면 우린 어떻게 할 뻔했니?’ 하하하.” 훗날 이문세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이 지나가면’ 역시 이영훈 작곡가(1960∼2008)가 한영애에게 먼저 제안했던 곡이다.
그는 자신의 곡 중 가장 아끼는 노래로 늘 ‘상사꽃’(작사 한영애, 작곡 이병우)을 꼽는다. 자기 장례식장에 그 노랫말을 걸어뒀으면 한다며. ‘바라본다’(작사 한영애, 작곡 김수철)와 ‘가을시선’(작사 한영애, 작곡 이병우)도 좋아한다.
음악적 뿌리는 어딜까. 해바라기의 포크? 엄인호, 김현식(1958∼1990)과 함께 했던 신촌블루스의 블루스? “장르로 치면 록이에요. 가사로 치면 사랑. 흔한 거 같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연기 한번 해볼래? 일용이한테 아내가 필요한데”(유인촌)
독특한 캐릭터와 극단 경력 덕인지 그는 연기자 데뷔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다. “하루는 유인촌 선배가 ‘영애야, 너 TV 안 할래?’ 하는 거예요. ‘전원일기’ 하시던 땐데. ‘일용이가 신부를 찾아야 되는데 네가 하면 어때?’ 고사했죠. ‘아, 선배님, 저 연기 안 되죠. 연극하고 TV 연기는 다르잖아요.’”
연예계는 예나 지금이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란 말이 잘 통용되는 곳이다. 한영애는 노를 제대로 젓지 않은 셈이다. 그가 원하는 행복의 강물은 다른 곳에 있었을까. “그쪽에 매력을 전혀 못 느낀 거예요. TV랑 상관없이 지냈죠. 아예 TV를 안 봤죠.”
한영애의 노래에서 발견되는 ‘마녀’는 한국적이기도 하다. 마녀에 무녀가 묻어 있다. “연극할 때 얘긴데 연출자가 어떤 테이프를 틀어줬는데 완전 쇼크를 받았어요. 씻김굿인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도에서 노래 잘한다는 아줌마. 유명 가수도 프로 국악인도 아닌. 막 이만한 에너지가 와서 내 뒤통수를 때리는 거예요. ‘나는 왜 그 멀리 있는 재니스 조플린만 찾았는가’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에너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거나 추측하는 것은 얼마나 좁았던가’.” 그는 명창을 사사해 몇 차례 레슨도 받았지만 국악 연습을 하다 보면 자꾸만 목이 쉬어 서구식 노래를 영영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들었고, 그 때문에 국악 수업을 접었다고 했다.
1992년 3집 ‘한영애 1992’에서는 마침내 자작곡인 ‘말도 안돼’(작사 작곡 한영애)가 큰 인기를 끌었다. 수록곡 중 프랑스어처럼 웅얼대는 내레이션이 들어간 ‘멋진 그대여’(작사 장제훈, 작곡 이영재)는 독특했다. “친구인 프랑스 시인이 원어 가사를 써줬는데 그땐 한국 가수가 노랫말에 외국어를 넣으면 안 되는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녹음할 때 프랑스어를 막 흘려서 발음해 버렸지. 돌아보면 너무 창피해요. 그런 자기 검열. 앨범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남는 거잖아요. 나중 사람들이 그 당시 사정을 알아주겠어요?”
그는 이 무렵 별난 녹음 태도로도 유명했다. 누워서 했다가 옷을 벗고 했다가…. 스튜디오에서 그저 내키는 대로 노래를 뿜어냈다고 했다. ‘말도 안돼’에는 손목에 주렁주렁 찬 방울 팔찌를 흔드는 소리를 즉흥적으로 음반에 담기도 했다.
“저는 꼬리가 5m쯤 되는 슈퍼 롱 드레스를 입었어요”
‘조율’(작사 작곡 한돌) 역시 클라이맥스다. “개개인이 자기에게 맞는 질서대로 아주 용감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은 노래죠. ‘말도 안돼’도 비슷해요. 돌아보면 이것 역시 자기 검열과 순화가 심했지만.”
무녀는 라이브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가 직접 꼽는 무대 위 결정적 순간은 1993년에 있다. 같은 이름의 실황 음반으로도 기록·발표된 ‘아.우.성’ 라이브. 63빌딩 컨벤션홀에서 연 대규모 콘서트다. “음향 장비를 너무 많이 가져갔죠. 그 무렵엔 ‘라이브 장비는 한영애가 조용필 다음’이란 말도 나왔으니까. 신대철, 신윤철 형제가 기타를 쳐주고 (송)홍섭 씨가 밴드 지휘를 했어요. 국악팀도 동원했고. ‘이어도’의 국악적 리듬을 표현해줄 거의 유일한 드러머였던 배수연이 스틱을 잡았죠. 저는 꼬리가 5m쯤 되는 슈퍼 롱 드레스를 입었고요.”
이날 공연에서 한영애가 보여준 에너지는 대단했다. 사고마저 연출로 승화시킬 정도로. “‘비애’(작사 작곡 유재하·1962∼1987)를 부르는데 관객들이 웅성웅성하더니 심지어 객석을 비우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관객들이 전부 저를 안 보고 천장을 보고 있었어요. 조명이 과열돼 불이 난 거였죠. 진화를 도울 것인지 노래를 계속할 것인지를 그 순간 고민했어요. 등 뒤로 스태프가 뛰는 소리가 나니 안심이 됐어요. 눈을 감고 노래에 더 몰입해 끝까지 해냈죠. 제가 동요하지 않으니 수천 관객도 조용히 노래를 듣더라고요. 그 실황은 음반에 그대로 담겼어요.”
포크와 블루스처럼 전통적 장르에 출발점을 뒀지만 한영애는 최근까지 첨단 전자음악을 활용한 실험을 계속했다. 1995년 4집 ‘불어오라 바람아’(‘불어오라 바람아’ ‘상사꽃’ ‘가을시선’ 수록)에 이어 낸 1999년 5집 ‘난.다’ 역시 ‘한영애 월드’에서 특이한 좌표다. “일렉트로니카를 해보고 싶어 시작은 했지만 처음엔 제가 아날로그 세대여선지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세포가 기억하게끔 관련 음악을 계속해 들었죠.” 한영애가 뜻밖에도 영국 전자음악 그룹 프로디지, 모치바, 포티셰드에 빠져 지내던 날들의 이야기다. 갈색의 사막에서 푸른 바다를 찾아서
일제 강점기 유행가를 록과 전자음악으로 재해석해 가요의 역사를 짚은 앨범 ‘비하인드 타임 1925∼1955’(2003년) 역시 디스코그래피에서 도드라진다. “그 무렵 가요사 연구를 했는데 직접 불러보고 싶어진 거예요. ‘우리나라에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들어와서 만들어진 최초의 것은 무엇일까’란 호기심이 동해서.”
지난해 11월, 그는 무려 15년 만에 정규 앨범을 냈다. 6집 ‘샤키포’다. 모던 록과 전자음악, 발라드가 고루 섞인 이 진보적인 앨범에 한영애는 컴퓨터로 자기가 직접 만든 연주곡도 실었다. 하긴, 기자의 언감생심, 은퇴라니. 그러기엔 아직 한영애의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아이처럼 큰 거다. “얼마 전에 전자음악 하는 젊은 친구와 작업에 들어갔어요. 내년 초쯤 디지털 싱글로 신곡을 낼까 해요.”
인터뷰 말미에 한영애는 불현듯 커피 테이블 한편에 놓인 치렁치렁한 장식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뼘 반 높이쯤 되는 나뭇가지 모양의 구조물에 진주목걸이며 양초, 리본, 은색 인조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테이블용 소품.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그걸 번쩍 들어올리더니 머리 위로 가져갔다. 머리핀을 대보는 것처럼. 그는 저쪽 테이블에 있는 의상 담당을 향해 외쳤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