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제대하고 나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군부대를 40년 동안 찾아다녔다. 최전방 부대에서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군 장성부터 갓 입대한 신병까지 모두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말 한마디면 수천 장병이 움직였다.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군복을 입은 적이 없지만 웬만한 장성보다 군대 역사와 사정을 잘 꿰고 있는 기이한 사내.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00여 차례 군부대 자선 위문공연을 벌이고 있는 김종수 한국군경예술인봉사연합회장(63)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군부대는 물론이고 교도소, 노인복지시설, 장애인시설 등 예술공연을 접하기 힘든 곳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갔다.
군인처럼 짧게 깎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22일 서울 종로구 서피맛골. 김 회장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골목길 같은 식당 입구 양쪽에는 그가 위문공연을 한 군부대에서 받은 기념품 수백 점이 전시돼 있었다. 부대 마크가 새겨진 시계, 모형 칼, 동상 등 골동품가게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들이었다. 식당 안 광경은 더 놀라웠다. 그가 위문공연을 한 군부대와 관공서 등에서 받은 감사패, 표창장, 감사장들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행여 닳을까 정성스레 코팅까지 했다. 눈에 가장 잘 띄는 식당 카운터 쪽 벽에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세계기네스협회가 ‘세계에서 표창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기록인증서도 있었다.
“한 1200여 점 될 겁니다. 이리 와 보세요. 이게 육군 1사단에서 받은 감사패입니다… 제가 전국 40여 개 사단 중 딱 3곳을 빼고 다 갔다 왔어요. 1970, 80년대 정훈장교 중에 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벽 가장 높은 곳에는 전국 군부대에서 받은 감사패가 순서대로 진열돼 있었다. 감사패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그의 얼굴은 처음 받은 상장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전국 군부대가 나의 무대
“우리 같은 예술인들은….” 김 회장은 자신을 포함한 위문공연 단원들을 이렇게 불렀다. 위문공연이 한 편의 영화라면 그는 감독 겸 배우이자 투자자, 제작자였다. 모든 위문공연의 기획부터 연출, 출연자 섭외까지 직접 맡았다. 직접 무대에도 오를 때면 주특기인 성대모사를 선보였다. 코미디언 이주일, 심형래, 김형곤 등 당대 유명 연예인 목소리로 야한 농담을 할 때면 수천 장병들이 열광했다. 고향에서 유명한 상쇠(농악대에서 꽹과리를 치면서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덕분에 노래는 물론이고 드럼에도 꽤 소질이 있었다.
“지금이야 군부대에도 오락거리가 많지만 옛날에는 군부대에 즐길 게 없었어요. TV조차 귀할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비록 성대모사일지라도 TV나 라디오에서 들은 연예인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위문공연을 보겠다고 인근 부대나 동네 주민들이 10리씩 걸어오는 일도 많았어요.”
공연에 춤과 노래가 빠질 수 없는 법. 아무리 작은 공연이라고 해도 사회자, 연주자, 가수, 무용수까지 최소 5명이 필요했다. 많게는 30명이 한 팀을 꾸리기도 했다. 유명 연예인도 동행했다. 가수 현숙 정재은 김상희, 개그맨 한무 서세원 황기순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연예인들이 그의 위문공연에 힘을 보탰다. 지금이야 연예계 원로로 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핫’한 연예인들이었다.
“TV에서 봤던 연예인들을 직접 본 장병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관객이 많을 때는 2000∼3000명씩 모이거든요. 그 많은 사람들이 제 공연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지켜보는 게 제게 가장 큰 보상이자 지금까지 위문공연을 하는 원동력입니다.”
위문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휴가가 걸린 장기자랑이었다. 일부 장병들은 휴가를 가기 위해 위문공연 몇 주 전부터 미리 연습을 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요즘이야 100일 휴가가 있지만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부대 배치를 받은 뒤 10개월 동안은 휴가를 가지 못했다.
“장기자랑에 나온 장병들이 다들 너무 잘해서 제 재량으로 한 번에 40명에게 7박 8일짜리 휴가를 준 적도 있어요.” 이런 이유로 그는 군 장병들에게 ‘산타클로스 김’으로 불렸다.
지독한 가난, 아나운서를 꿈꾼 소년
어린 시절 김 회장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라디오로 아나운서의 스포츠 중계방송을 듣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1950, 60년대 스포츠 중계를 도맡았던 이광재, 임택근 아나운서의 방송은 빼놓지 않고 들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입니다.” 이들의 단골 멘트를 수없이 따라하며 꿈을 키웠다. 또래들 사이에서 ‘그럴듯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자신의 끼를 깨닫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꿈보다는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
전북 부안에서 5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난을 피해 무작정 서울로 왔다. 구두닦이, 주유소 직원, 신문 배달 등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관공서 내 식당을 찾아가 설거지를 자처하고 남은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3일 동안 굶다가 겨우 한 끼를 먹을 때도 많았죠. 그럴 때면 ‘먹고 나서 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포만감을 오랫동안 누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잘 먹지 못한 탓에 김 회장은 체중 미달로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그의 키는 162cm로 형제들 중 가장 작다. 끼니를 때우는 데에만 매달려 10여 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대 최고 코미디언인 남보원의 ‘원맨쇼’를 본 게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온갖 사물소리를 똑같이 내는 게 하도 신기해서 저도 따라 해 봤죠. 며칠 연습하니깐 저도 잘되더라고요. 그때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오디션만 보러 다녔습니다. 번번이 떨어지다가 2년 만에 ‘아리랑 쇼단’이라는 제법 큰 쇼단에 들어가면서 ‘무대’ 인생이 시작됐죠.”
당시 쇼단은 가수, 코미디언, 무용수 등 대중 예술인들이 모인 공연 단체였다. 김 회장이 처음 선 무대는 영화 상영 직전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공연, 일명 ‘아도로크 쇼’였다. 주로 무명 가수, 코미디언들의 등용문 같은 무대였다. 2시간 넘게 노래와 춤, 만담으로 구성된 일명 ‘잇뽕쇼’는 오로지 실력파만 오를 수 있는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마음을 빼앗긴 곳은 군부대였다. 선배 단원을 따라 군부대 위문공연을 간 게 계기였다. ‘이곳이야말로 대중예술이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에 쇼단을 그만두고 직접 위문공연단을 꾸렸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김 회장은 오로지 위문공연을 위해서만 살았다. 회당 최소 200만 원에 이르는 공연비는 김 회장이 기업 행사, 환갑잔치에서 사회를 보고 번 돈으로 마련했다. 이게 부족할 때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장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40년째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다. 단 한 번도 공연을 미루거나 취소한 적이 없었다. 공연 전날에는 되도록 전화를 받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둔 장수의 마음이었을까.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에 오르려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남들은 미쳤다고 하죠”
단 한 번. 더 큰 무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외도’를 한 적도 있다. 김 회장은 마흔한 살이던 1993년 SBS 특채 개그맨으로 입사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한번 승부를 걸어보자는 각오에서였다.
하지만 젊은 개그맨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송사 개그맨 생활을 하면서 위문공연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공 들인 위문공연의 명맥이 이대로 끊길 것만 같았다. 방송 개그맨 생활은 1년 5개월 만에 접었다.
위문공연만 바라보고 사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돈이 안 되는 일을 왜 하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좋게 말해 ‘기인’이죠. 저도 제가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의 기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위문공연을 할 때면 장기자랑을 잘한 사람에게는 사비로 영치금을 넣어줬다. 1991년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수도방위사령부가 지금 위치인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전할 때 시가로 1000만 원이 넘는 해태상을 기증했다. 지금도 군부대, 교도소에 그림을 기증하는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3년 전부터는 매주 일요일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홀몸노인 200여 명을 초청해 무료 급식과 공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무료 급식을 이용하는 노인이 늘어날수록 손님은 줄었다. 매월 300여만 원의 적자를 보고 있지만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돈과 명예를 바랐다면 이 길을 택하지 않았겠죠. 잘나갈 때 행사 한 번 뛰어 1000만 원 넘게 벌 때도 있었어요. 마음만 먹는다면 돈 잘 벌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위문공연을 할 때처럼 만족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제겐 이 일이 ‘천직(天職)’입니다.”
강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하지만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재 그는 아내와 15년째 별거 중이다. 용건이 있을 때에만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서른이 넘은 두 아들과는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때는 양장점을 운영하던 아내도 물심양면으로 위문공연을 도왔지만 양장점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가족의 생계는 아내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위문공연을 하러 집을 비울 때가 많아 자식들에게 정을 쏟을 시간도 없었다. 가족 경조사도 제때 못 챙겼다. 무능한 남편이자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였다.
“실패한 가장이죠. 가족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제 인생을 후회하진 않아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했으니까요. 멋진 사회사업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김 회장은 자신이 기증하는 그림을 받으러 왔다는 부대 관계자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어렵게 찾은 꿈이었기 때문일까. 꿈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속세를 떠난 종교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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