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손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탄산음료 캔을 쥐고 있을 때는 작게 오므린 채, 책상 위에 올려놨을 때는 조금 느슨하게 편 채, 다섯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옆에 앉아 조금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상상 연주’를 하는 소녀. 지난달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피아노’의 주인공, 유예은 양(13)이다.
유 양은 다섯 살이던 2007년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해 처음 이름을 알렸다. 유 양은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이 태어나 수술로도 앞을 볼 수 없다. 악보는 물론이고 음표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본 적이 없는 소녀가 제목도 외우기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통째로 외워서 치는 모습에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열광했다.
하지만 잠깐의 인기는 소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영화는 ‘스타킹’이 안겨준 유명함이 사그라진 뒤인 2010년부터 약 3년 동안 유 양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후반 작업을 거쳐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또다시 2년, 소녀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달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유 양과, 영화에서 유 양의 멘토로 등장하는 피아니스트 이진욱 씨(35)를 만난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 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졸업하고 현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신동으로 불리던 소녀
“음…. 기억이 잘 안 나요.”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유 양이 가장 자주 한 말이다. ‘스타킹’에 출연했던 것도, 큰 행사에서 연주를 여러 차례 했던 것도,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TV 나갔을 때 믹키유천(박유천) 오빠랑 얘기했던 건 생각나요.” 2008년 SBS ‘초콜릿’에 출연해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를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잘 챙겨주던 멤버의 이름을 겨우 기억하는 정도다.
그러나 이 씨는 유 양을 만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1년 유 양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였다.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님 연구실에 들렀는데 예은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저와 잘 맞을 것 같다고요.”
유 양이 한예종까지 찾아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유 양의 어머니 박정숙 씨(45)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아버지 유장주 씨(48)는 경기 포천시 외곽에서 장애인 복지시설을 운영하며 장애인 10여 명과 함께 생활한다. 논밭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는 마땅한 피아노 선생님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 유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 양의 멘토를 찾아 여러 대학 음대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중 주성혜 한국예술종합대학 음악원 교수가 답장을 했고, 주 교수가 자신의 제자이던 이 씨를 유 양과 연결해줬다.
“예은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고 있던 친구예요. 사교육 없이 혼자 도서관에서 책 읽으며 학문을 터득하는 학생 같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테크닉 위주로 정확하게 치길 요구하는 일반적인 한국식 교육과는 안 맞는다고 선생님이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제가 하라는 거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거든요.”
악보를 보지 못하는 피아니스트
유 양이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세 살 무렵이다. 이웃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피아노를 집에 가져다 놨더니 건반을 누르며 놀다 스스로 음을 터득했고, 곧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유 씨가 이런 모습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 방송 출연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신동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 양의 꿈은 피아니스트.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콩쿠르에 나가 수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유 양이 한 곡을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길다. 선생님이 왼손과 오른손을 구분해 쳐 주는 선율을 녹음해 수십 번 반복해 들으면서 외워야 한다. 건반도, 악보도 볼 수 없으니 정확하게 쳐야 좋은 점수를 받는 콩쿠르에서는 절대 불리하다.
유 양에게 “연주회와 콩쿠르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묻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연주회요! 콩쿠르는 경쟁해야 하잖아요. 잘 쳐야 하니까…. 처음에는 학교에서 숙제가 너무 많이 나와서, 콩쿠르 나가면 숙제 안 해도 되니까 콩쿠르 나가는 것도 좋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영화에는 유 양이 콩쿠르에 도전했다 좌절하는 과정이 등장한다. 선생님에게 “왜 자꾸 박자를 버리느냐(정확히 치지 않느냐)”고 혼이 난 뒤 혼자서 피아노 앞에서 울기도 한다. 콩쿠르 출전 뒤 한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기도 했지만 지금은 훌쩍 큰 키만큼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처음에는 음을 하나도 안 틀리고 치는 게 잘 치는 건 줄 알았고, 그 다음엔 제 소리를 들으면서 치는 게 잘 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냥 즐기면서 치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아직도 유 양은 정확한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어제는 손목을 반듯하게 하고 손가락은 살짝 구부리고 피아노를 쳤어요. 그랬더니 손도 안 아프고 소리도 잘 나서 연습이 지루하지 않더라고요.”
피아노는 내 모국어
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유 양에게는 또 다른 재능이 있다. 바로 작곡이다. 영화에는 유 양과 이 씨가 함께 즉흥 연주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유 양이 그날 기분을 담아 선율을 만들어내면 이 씨가 조금 바꿔서 치고, 유 양이 다시 이어서 치는 식이다. 두 사람은 즉흥 연주를 주고받으며 유 양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인 백설공주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작곡했다. 2011년 8월 열린 이 씨의 연주회에서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일반 피아노학원에서 배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저만 해도 어릴 때 악보 보면서 8분 음표가 무엇인지부터 배웠는데, 예은이는 음의 높낮이나 리듬을 동물적으로 익혀서 치는 것 같더라고요. 어린아이들이 외국어를 알파벳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계속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예은이는 모국어 배우듯 피아노를 익힌 거예요.”(이 씨)
이 씨는 “그동안 혹독하게 연습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예은이처럼 좋은 소리를 내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아이가 소나타 한 악장을 다 쳐야만 김밥 하나를 주는 부모도 있다니까요. 그러다 보면 피아노를 왜 치는 지도 모르고, 재미도 못 느끼죠. 그런데 예은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정말 예뻐요.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제가 다 신기할 정도로요. 예은이가 곡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아, 이 아이가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지죠.”
유 양도 요즘 작곡 욕심을 좀 더 내고 있다. “곡을 만들긴 하는데 자꾸 잊어버려요. 그래서 구성해서 만들려고요. 글로 쓸 때 구성하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시작도 있고 클라이맥스도 있고 끝도 있고, 소설 쓰는 것처럼, 그러면 안 잊어버릴 거 같아요.”(유 양)
물론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다. 영화 촬영 중 제작진은 한 작곡 콩쿠르에 유 양이 출전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작곡한 곡을 악보로 제출해야 한다’는 조건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악보를 볼 수 없는 유 양이 악보로 자작곡을 제출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 음원으로 제출할 수 없느냐는 문의에도 주최 측은 악보로 제출해야 한다는 회신만 줄 뿐이었다. 한예종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소외계층 대상 아카데미에도 참가해보려 했지만 작곡 분야는 모집하지 않아 지원할 수 없었다.
‘피아노 플래시’ 들고 나타날 그날까지
하지만 포기란 없다. 유 양은 요즘 점자 악보를 익히고 있다. 음계는 다 배웠는데 악보 기호를 배우는 일이 남았다. 영어 점자 읽는 법도 배워서 이제 알파벳을 읽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배우고 외워야 할 것이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되는데 새로운 악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요즘 플루트를 배우는데, 처음엔 소리가 안 나서…. 선생님이 입 모양을 이렇게 해서 하라고 가르쳐 주셔서 이번 주에 겨우 소리가 났거든요. 플루트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에 어울리는 거 같아요.”
얼마 전 엄마가 마트에서 사와서 요리해준, “피아노를 진하게 치는 맛”이 나는 로브스터를 잊지 못하고, 배우 김상경이 나오는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를 너무 좋아해서 대사를 다 외운다. 하지만 유 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장난감이나 친구 대신이었던 피아노다. ‘민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남자친구로 삼았다. “플루트랑 바람피우는 거냐”고 농담을 던지자 “아니다, 요즘도 피아노를 제일 많이 친다”며 발끈했다.
그런 유 양에게 꿈을 묻는 건 괜한 말을 시키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할 정도다. 답은 망설임 없이 나온다. “피아니스트요.” 이 씨가 물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세상을 비추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비추는데. 플래시 들고 다닐 거야?”
“네, 피아노 플래시. 크크. 슬퍼하는 분들, 가난한 분들한테 제 곡을 들려드리면 빛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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