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듬해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여사원을 뽑는 회사가 드물었다. 어떤 곳은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막상 면접을 가도 결국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전공불문, 성별불문’이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 광고사가 신입 카피라이터를 모집했다. 어렸을 때 소설가가, 대학생 때 기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글 쓰는 일이라기에 무턱대고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끼와 감각 있는 이들로 차고 넘치는 광고계에서 말수 없고 목소리까지 작은 그는 외계인이었다. 입사 반년이 지났을까. 한 선배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이 ‘숫기 없는 여사원’은 훗날 이름난 카피라이터가 됐다. 최인아 제일기획 전 부사장(54)이다. 삼성그룹에서 공채 출신으로 첫 여성 임원이 된 뒤 최초의 여성 상무, 최초의 여성 전무, 최초의 여성 부사장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
겉보기에 화려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스스로를 ‘실패의 달인’이라 했다.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주기적으로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만둘까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내면은 늘 전쟁터였다. 다만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켰고 외부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나긋하고 느리게 말하는 그는 차분함과 무난함이란 수식어가 어울려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영국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이 만든 ‘인생학교’ 서울 분교에서 교사로 나서 흔들리는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1984년 제일기획에 입사한 그는 소수민족과 다름없었다. 임원은커녕 나중에 차장이나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호봉은 남자 동기들보다 3년 뒤졌고 여자 동기들은 어느 순간 결혼하고 회사를 떠났다. ‘여사원을 뽑아도 금세 그만뒀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속으론 ‘그래?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별나지 않아도 ‘광고쟁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사물의 본질을 곱씹어보면서 카피를 만들었다. 가족이 아파 속상한 일, 상사에게 혼났던 일, 친구와 수다 떠는 일 등을 ‘나만의 언어’로 보여줬다.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무기가 됐다.
“혼자 여행하고 혼자 영화 보고 스스로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저는 안테나를 바깥이 아닌 안에 세우고 제 안에서 답을 찾는 편이죠. 골몰하다 보면 답이 나오는 순간이 있어요.”
물론 이렇게 나온 카피를 고객사가 늘 채택하지는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인데 채택이 안 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이럴 땐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단 제가 좋다고 생각하면 ‘자식들, 좋은 걸 못 알아보네’라고 넘길 줄 아는 배짱이 있어야 하죠. 스스로 중심을 잡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남(광고주)이 선택했다고 좋아하고 아니라고 해서 가라앉으면 결국 내 삶은 남에게 휘둘리게 되죠.”
이렇게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고객이 OK할 때까지 OK! SK’, ‘자꾸자꾸 당신의 향기가 좋아집니다’ 등 히트작을 연이어 내놓았다. 당시 한국은 국제 광고계에서 변방에 가까웠지만 그는 칸 국제광고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나이라는 벽
2000년 그는 삼성에서 여성 공채 출신의 첫 임원으로 발탁됐다. 제일기획이 광고 대가에게 주는 ‘마스터’ 호칭도 처음 받았다. 하지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마흔 중반에 다가가면서 점점 중심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이라는 벽을 넘었다고 여기는 순간 나이라는 장벽을 만났다. ‘간판급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이제 좀 있으면 바빠지겠거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후배가 그 일감을 맡아 이미 진행하고 있는 걸 알게 됐다.
“일에 흥미도 자신감도 없었고 의미도 찾지 못했어요. 제 성과가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죠. ‘앞으로 나이 들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 밀려왔고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직장인의 본격적인 사춘기가 찾아왔다고 할까요.”
결국 2006년 휴직했다. 임원인 데다 진급을 앞둬 주변에선 어떻게 하든 자리를 지키라고 말렸다. 학위 따는 공부를 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민에 솔직하게 맞서고 싶었다. 스페인 산티아고로 일단 떠났다.
“인생에서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일이 많죠. 하지만 시간을 X축, 성과를 Y축으로 하면 계단식 그래프가 나와요. 한 달 공들여 운동했는데도 살이 안 빠질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살이 빠져 있는 식이죠. 뭔가 성취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확실한 구간을 어떻게 이겨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아요. 절실하고 단단한 사람을 가리는 ‘우주의 테스트’인 셈이죠.”
산티아고에서 하루에 18km에서 34km까지, 총 36일간 800km를 걸었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날락했다. 머리는 생각에 빌려주는 공간일 뿐, 그야말로 ‘온몸’으로 생각했다. 3주쯤 지났을까. ‘아, 내가 나이에 무릎 꿇고 싶지 않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게 아니라 다만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더 걸릴 뿐이란 걸 알게 됐죠. 20, 30대에 열흘 걸리던 일이 40대에는 3주가 걸리는 식으로요. 나이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어요.”
뾰족한 답을 찾지는 못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젠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회사에서 ‘후진’ 일을 하라고 해도 쓰일 곳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직원의 선배로
복귀한 그는 스스로의 역할을 다시 규정했다. 그간 회사에서 받은 걸 돌려주기. 전과 달리 이젠 모든 직원들의 선배가 되고 싶었다.
“자기 이름 걸고 뭔가를 하기보다는 다른 직원을 끌어주고 저처럼 헤맸던 직원이 있다면 손을 잡아주고…. 그게 ‘밥값’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질 게 뻔한 프레젠테이션(PT)에서는 스스로 총대를 멨다. 대개 10∼12년 차가 팀장으로 나서지만 지는 게임엔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전무였던 그가 팀장을 자청했다. 광고주 앞에서 ‘저는 여기 이기러 오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솔루션일 거 같아서 전해주러 왔다’고 말했다. 물론 ‘패(敗)’했다. 하지만 떳떳했다.
“당장 불리해 보여도 ‘나다움’을 지키고 싶었고 그게 품위를 지키는 길이죠. 어릴 땐 스마트한 게 중요했다면 연차가 들어선 한 인간으로서 신뢰할 만한지와 강한 심장을 지녔는지가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어요.”
제작본부장을 지낼 때 제일기획이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3년 연속 석권하는 등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2012년 부사장을 끝으로 돌연 사표를 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여성 중에서도 최고경영자(CEO)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등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여서 의외였다. 삼성 최초의 공채 출신 첫 여성 임원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까.
“저는 ‘깜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조직의 비극은 자리에 허용된 파워와 해당 인물이 갖춘 역량이 일치하지 않아 비롯될 때가 많아요. 부족한 재주지만 다 쏟아부어 미련이 없었어요. 프로젝트 몇 개가 잘되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된 듯 쉽게 취하지만 저는 스스로 냉정하게 돌아보는 ‘방부제’를 지니고 싶었어요.”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연세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휴학생’. 평소 못 해본 공부를 원 없이 하고 싶어 지난해 입학했다. 하지만 한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열띤 PT를 벌이는 장면을 보다 갑자기 맥박이 빨라졌다. 전에 밤새워 작업한 뒤 광고주 앞에서 PT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고민 끝에 창업을 위해 휴학했다.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세워 빠르게 변하는 매체 환경에서 또 다른 역할의 ‘광고쟁이’를 해보고 싶어서다. 그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부족한 재주지만 주저앉지 않기 위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했다.
▼ “똑똑한 여성보다… 편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세요” ▼
성공한 것처럼 비치는 임원들조차도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최인아 전 부사장에게 물었더니 대뜸 “만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무 시절 회식 때였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선배 임원이 그에게 와서 “얘는 쪼끄만 게 어려워”라고 말했다. 윗사람조차 어렵게 생각할 정도니까 아랫사람은 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직원의 일화를 꺼냈다. 빈 구석이 있어 보이는 A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B. 같은 일을 맡겼더니 A의 성과가 의외로 더 좋았다. A에게는 주변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줬고 A는 그걸 받아들여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반면 B는 순전히 혼자 일했고 그 탓에 보완할 게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만만하지 않게 보이는 게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커서는 다르죠. 제가 선후배에게 더 편한 사람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더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었다면 더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죠.”
여성 후배들에게는 “일하고 싶은 상대가 돼야 한다. 조직에서 때로는 희생할 줄 알고 싫은 걸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똑똑한 여자들이 대개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다. 실제로 남자보다 더 똑똑할 때가 있고요. 하지만 ‘괜찮은 동료’가 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혼자 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요. 승승장구할 때는 놓치기 쉬운 덕목이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태도가 곧 경쟁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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