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에 대해 묻고 싶을 때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원로 중 한 사람이다. 42년간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비서로 살아온 이원종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76). 등원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바둑판이든 정치판이든 옆에서 지켜보는 훈수꾼이 수를 더 잘 볼 수도 있다. 이 전 수석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인생 같기도, 주군의 인생 같기도 한 얘기를 들어봤다. 》
―어떻게 YS와 인연을 맺게 됐나.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선언을 보고 큰일 났다 싶어 무작정 반(反)유신투쟁에 뛰어들었다. 1973년 이모부(김명윤 전 의원)의 선거운동을 돕다 신민당과 연을 맺었고, 당시 신민당 총재인 YS의 비서실장이던 경복고 후배 김덕룡 전 의원의 권유로 YS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YS가 즉흥적? 굉장히 치밀했던 분
―YS가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평해 달라.
“시대를 보는 통찰력이 탁월하다. 특히 큰 흐름을 파악하는 전략에서 뛰어났다. 그런 전략적 마인드가 없었다면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도, 3당 합당도, 집권 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도 결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필담으로 자식에게 ‘화합과 통합’의 메시지를 남긴 것도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걸 말해준다. 그 어른의 머릿속에는 항상 나라 걱정, 국민 걱정이 가득했다. 재임 중 일어난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사고가 딱히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옛날 임금처럼 국민을 힘들게 하는 일은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임 중에 국민에게 사과도 참 많이 했다.”
―YS가 즉흥적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겉으로만 보고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굉장히 치밀하셨다. 여행을 가게 되면 며칠 전부터 자신이 손수 여행가방을 챙길 정도였다. 1990년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과 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때 내각제 합의 각서를 쓴 것이 나중에 언론에 폭로됐다. 그러자 어른께서 ‘나는 늘 한문으로 서명을 한다’면서 각서에 쓰인 한글 서명을 언급하며 ‘내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혹시나 나중에 탄로 날 것을 대비해 한글로 서명을 하고 변명거리도 미리 준비해뒀던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원래 치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를 하기 어렵다.”
―1987년 대선 때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후보 단일화를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노태우 씨에게 넘어간 것 아닌가.
“YS는 끝까지 당내 경선으로 후보를 결정하자고 했지만 DJ가 동의하지 않았다. DJ가 경선에 승산이 없다고 여긴 것 아니겠는가. 결국 당을 나가 따로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당시 DJ는 ‘출마를 하면 국민한테 욕먹고, 출마를 안 하면 호남사람들한테 죽을 것이기 때문에 물러설 곳이 없다’고 했다더라.”
당시 YS와 DJ가 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누구든 노태우 후보를 이겼을 것이고, 그러면 실질적 민주화가 5년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 전 수석도 그렇게 생각할까. “노태우 36.6%, YS 28%, DJ 27% 득표만 보고 그렇게들 말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YS와 DJ 지지자들이 모두 민주화 세력인 것은 맞지만 지지세력의 이해관계는 크게 달랐다. 단일화를 했더라도 두 사람의 지지세력까지 산술적으로 합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YS가 3당 합당을 결심한 까닭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고심의 결단이었다고 본다. YS와 DJ 둘 중 누구라도 대통령이 되면 군정 종식이 가능할 텐데 야당이 분열된 채로는 둘 다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고 말한 것이다. 3당 합당이 아니었더라면 군정이 얼마나 더 연장됐을지 모를 일이다.” 군사문화의 물 빼낸 문민정부
이 전 수석은 훗날 퇴임한 YS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소개했다. YS가 몇몇 정치학자와 식사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교수들이 “이 수석이 3당 합당을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연합이라고 했는데 각하도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YS는 “이 수석이 그렇게 설명했나”라고 묻고는 “나는 그런 복잡한 거 모르겠고 정권 잡고 싶어서, 쉽게 말해서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했다”라고 답했다. 이 전 수석도, 교수들도 너무 솔직한 표현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서거 전까지만 해도 YS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야박했다.
“진짜 억울했다. 임기 말 외환위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지만, 사실 YS 때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니 정보화니 하는 테제도 기막히게 찾아냈다. 정보화 시대에 대비해 정보통신부를 만들고, 세계화 시대에 대비해 해양수산부도 만들었다. YS의 선구안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사실 30년간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우리 사회를 제도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문민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로 바꾼 것만 해도 보통의 업적이 아니다. 이 땅에서 군부 쿠데타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한 것이다. 만약 군부세력과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DJ 정권 탄생이 가능했겠는가. 기회가 되면 제대로 YS시대를 재조명해보려고 한다.”
YS가 하나회 척결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는 바람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장군들의 군복에 달아줄 별은 진급 시기에 맞춰서 만든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회 멤버들을 대거 숙청하고 새로 인사를 하다 보니 진급 신고를 하는 장군들에게 달아줄 별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장군들이 달고 있던 별을 빌려서 달아줬다.
―YS가 DJ의 당선을 도왔다는 일각의 평가에 동의하나.
“임기가 끝나는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는 다음 대통령선거가 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YS 임기 말 DJ 비자금 자료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더라면 대선이 진행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한테 수사 중단을 지시한 것이다. YS도 이인제 후보를 주저앉히려고 무진 노력했다. 그런데 정작 여당의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집에 찾아간다고 해놓고 하순봉 비서실장을 대신 보내며 성의를 안 보였다.”
―지금의 정치인들이 YS한테 배워야 할 점을 말해 달라.
“정치는 바른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다수의 국민에게 유리한 결정을 하는 게 현실 정치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충돌할 땐 책임윤리를 선택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확고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왜 정치를 하는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제시해야 한다. 정치를 권력으로 여긴다면 바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곧 부여받은 책임이다. YS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붙들고 평생 국민과 동행하는 정치를 했다.” 박 대통령 ‘깃발식 리더십’ 안 통해
―그럼 YS와 DJ 시대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을 꼽는다면….
“장기 집권하는 군부정권과 싸우려니 그들도 사실상 1인 정당에서 하향식 군사문화적 리더십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땐 그게 효율적이었다. 이제 그런 효율성은 필요치 않다. 국민과 함께해야 하는 민주주의 시대가 왔다. 그 시대와 지금의 국민도 다르다. 국민의 역량을 활짝 받아들이는 정치를 해야지 더 이상 국민을 끌고 가려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전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을 ‘깃발식 리더십’으로 표현하면서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올바르다고 여기며 국민을 계도해서 자기 방식대로 끌고 가려는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요즘 ‘정치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87년 체제의 등장 이후 정당 밖의 민주주의는 질적 양적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한 반면 정당 안의 민주주의는 그에 상응하는 발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의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국민과 소통해야 할 정당 고유의 기능을 소홀히 것이다. 기득권에 안주해 사회 변화를 쫓아가지 못한 한국 정당의 자폐증이 정치 위기의 근원적 병인이라고 본다. 정당의 개방으로 상향식 의사결정 같은 당내 민주화가 필요하다.” 직언도 올바로 해야 먹힌다
이 전 수석도 한때 소통령이니 부통령이니 실세니 하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났는지 궁금했다. “나는 아주 편하게 대통령을 대하는 편이었다. 대통령과 인터폰으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는데 ‘각하께서 그런 것까지 꼭 아셔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같은 대화를 사람들이 들으면 내가 무슨 엄청난 신임을 받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와전된 것이다.”
그래서 직언도 해봤느냐고 물었다.
“사실 윗사람한테 직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듣는 사람한테 고통을 주는 일이다. 지도자는 누구나 자존심이 강하다. 직언을 하더라도 온갖 당의(糖衣)를 입혀 윗사람으로 하여금 ‘이거 원래 내가 생각하던 거야’라는 인식이 들게 해야 한다. 건의하는 사람이 생색을 내려 해선 안 된다.”
그의 집 전화와 휴대전화 번호가 0003이다. “1980년대 중반 이사를 갔는데 고교 선배라는 전화국장이 찾아와 좋은 전화번호 하나 선물하겠다며 준 것이 0003번이었고, 1993년 정무수석으로 청와대 들어가니 사무실 전화도 0003번이었다. 휴대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지인인 SKT 사장이 0003번을 선물로 주었다. 평생 영삼(03)을 모시고 살라는 운명이었나 보다 싶었다. ”
―최근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이란 책을 발간했다. 어떤 취지인가.
“국가 위기 때마다 나타난 국민의 전략적 선택과 현실적 판단, 응집된 행동은 우리만의 독특한 정체성이다. 국민이 곧 국가와 정치의 중심이었는데도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이런 국민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는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존경받는 지도자나 앞서는 리더십은 정치의 중심에 국민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전 수석은 대학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민주화 투쟁 자체가 정치였다. 어른을 모시는 것 자체가 정치였다. 어른께서도 정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민주화를 이뤄냈으니 그만하면 된 것 아닌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