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금수저, 흙수저 얘기가 나오고 외국으로 떠나려는 움직임도 있잖아요. 하나의 힘으로 민주화, 산업화도 일궜는데 청년들이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큰일이죠. 이제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할 때입니다.”
5일 서울 강남구 아셈센터에서 만난 이홍훈 전 대법관(70·사법연수원 4기)은 늘 그렇듯 조금 어눌하지만 진솔하게 말했다. 35년간 법관 생활을 한 그는 지금은 법무법인 화우에서 공익재단을 이끌고 있다. 화우공익재단은 대한변호사협회와 대한변협 인권재단이 제정한 ‘제4회 변호사공익대상 단체부문’에 선정됐다. 정관수술과 낙태로 피해를 본 한센인들을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고, 노숙인과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꾸준히 공익활동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그는 기본적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변호사의 사명으로 규정한 변호사법 1조를 언급했다. “공동체의 기본이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특히 대법관 출신들이 공익 활동에 나서는 게 법조인 전체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2013년 8월부터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법조계의 기존 관행을 거부하면서 내부 징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년 반 동안의 논의를 거쳐 법조인이 따라야 할 행동지침으로 지난해 11월 ‘법조인 윤리선언’까지 선포했다. 선언에는 ‘인권 옹호와 정의 실현’, ‘사회적 약자 및 국민 권익 보호’ 등 6가지 덕목이 담겨 있다.
그는 “생존의 문제 때문에 변호사들이 사명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윤리를 잘 지켜야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신임 법조인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해 선언문을 체득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법관 생활을 그만두고 1년 동안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일한 그는 2011년 국회에서 통과된 ‘전관예우방지법’(자신이 근무했던 임지 사건을 1년간 수임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 적용 대상 1호로 알려져 있다. “법이 통과되지 않았더라도 개업하지 않고 조용히 시골에서 보낼 생각이었어요. 그 뒤 공익활동을 하려던 참에 로펌에서 제의가 왔고, 고민 끝에 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수락했습니다.”
법관 시절 그는 네 차례 낙마 끝에 다섯 번째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때 비로소 대법관이 됐다. 이순(耳順) 때 뒤늦게 시작한 대법관 생활은 정년 탓에 임기 6년을 채우지 못하고, 5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컸다. 파업이 예측 불가능했을 때만 제한적으로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2011년 대법원 판례를 바꾸는 등 박시환, 김지형, 김영란, 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소신 있는 소수의견을 많이 내 ‘독수리 5남매’로 불렸다.
그는 “남들보다 늦게 대법원에 들어갔으니 어쨌든 다양화는 한 셈이다. 국가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는 점에서 젊은 사람들과 의견이 같았고, 그래서 외롭지 않더라”며 웃었다.
그는 “정치권과 정부로부터 침해당할 수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게 사법부의 책무”라며 “대법원이 헌법상 인권을 보장하는 의미 있는 판결들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권변호사인 고 조영래 변호사와 경기고, 서울대 법대 동기다. 사람을 위한 법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절친한 친구처럼 그의 시선도 늘 사람을 향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