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이른바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 처리를 무산시킨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사진)을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에서 인터뷰했다. 김 위원장은 “여야가 합의한 기업활력제고특별법 등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얼굴마담이나 되려고 더민주당에 올 결심을 했겠느냐. 당을 변모시키려고 왔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서는 “지난 대선에서 받은 1460만 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
김종인(76)은 ‘문제적 인간’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2번의 비례대표(11, 12대), 노태우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과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세 번째 비례대표(14대), 노무현 정권 때 네 번째 비례대표(17대)를 지냈다. 좌우를 넘나들며 4번이나 비례대표를 지낸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대선 때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과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경제 민주화’ 브랜드를 앞세워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 이제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겸 선대위원장으로 또 한번 좌우의 강을 넘었다.
그러면서도 모셨던 주군(主君)에게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다. 아니, 주군 개념 자체가 없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문재인 대표가 물러나고 선대위원장이던 그가 비대위원장까지 겸하는 지난달 27일 더민주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어 31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김 위원장은 문 전 대표를 향해 “지난 대선 때 받은 1460만 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의 국회 진두지휘 첫 작품은 여야 합의 파기였다. 선거구 획정 빼고 뭘 논의하나 ―‘당을 수권정당으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여야가 합의한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과 북한인권법의 29일 국회처리를 왜 뒤집었나.
“원샷법 등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선거구 획정이 더 급하기 때문에 같이 하자는 것이다. 원래 12월 31일까지 선거구 획정을 했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여야가 29일 처리하기로 날짜를 박아 합의한 사항이다. 합의를 파기하고 새로운 걸 연계하는 것은 투쟁이나 하는 정당, 운동권 논리에 빠진 정당의 모습이 아닌가.
“그게 투쟁이나 운동권과 무슨 관계가 있나. 여야 합의에 보면 ‘나머지 쟁점 법안을 계속 논의한다’고 돼 있다. 가장 시급한 선거구 획정을 빼놓고 여야가 계속 논의해서 뭐 하겠는가.”
그에게 “비례대표도 4번이나 하고, 장관과 수석비서관, 은행 이사장(국민은행·1989년) 등 하실 만큼 하셨는데, 그 연세에 또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대뜸 조부(가인·街人 김병로 선생) 얘기부터 꺼냈다. 가인은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으며 1948년부터 초대 대법원장에 9년 4개월간 재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
“내가 정치를 실질적으로 체험한 건 24세(세는 나이) 때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치활동이 허용된 1963년 조부께서 정치 정 자(字)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셨다. 딱 지금 내 나이 때다. 창당 과정에서 할아버지 심부름을 다 했다. 창당 후에도 대통령후보 단일화, 야당 단일화 추진 과정도 봤지만 결국 야당 단일화도, 후보 단일화도 못 했다. 그때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라 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선 무슨 공부를 했나(김종인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나와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가서부터 당시 우리나라 경제발전 단계에서 뭐가 필요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재정과 세제, 예산과 사회보장 문제 등을 공부하고 왔다. 돌아와선 서강대에서 재정학 강의를 했는데, 1974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논의됐을 때 남덕우 재무장관이 도와 달라고 해서 정부 정책을 조언하게 됐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국가와 관련된 분야를 주로 공부했고, 그걸 실현하려면 정치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 하면 ‘경제 민주화’인데, 경제 민주화가 도대체 뭔가. ‘경제 민주화가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만큼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소수의 경제 권력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경제 민주화를 구현하는 정당이 선택받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양극화가 더 벌어지지 않게 중재를 하고 좁혀 나가는 게 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런 걸 하려면 모두 입법 사항이다. 제대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이 많아야 입법이 제대로 추진된다. 기본적으로 시장은 자연적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 줘야 된다. 그래서 내가 1987년 헌법 경제 조항인 119조 2항에 경제 민주화의 못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 얘기 좀 들려 달라. 119조 2항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당시 헌법특위가 만들어졌는데 내가 경제조항 담당 분과위원장이 돼 이 조항을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께 보고하러 갔더니, ‘빼라’고 했다. 그래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사회의료보험제도를 만들었는데, 미국의사협회와 제약회사 등이 제소해서 위헌 판결을 받는 바람에 실시가 중단됐다’는 예를 들었다. ‘경제가 발전하면 경제를 다루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에 이런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정부는 그런 걸 방지할 능력을 갖지 않으면 나라 운영이 어렵다’고 설득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경제 민주화에 꽂힌 건가, 독일 유학 영향인가.
“독일 유학 영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사를 보면 그런 정도는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전두환 설득해 ‘경제민주화’ 넣어
―이제 더민주당을 지휘하게 됐다. 일각에선 더민주당의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때문에 얼굴 마담 역할만 할 것이란 우려가 있다.
“내가 얼굴 마담이나 되려고 더민주당에 올 결심을 했겠나. 더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지금 모습으로는 안 된다. 맨날 투쟁이나 하고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언행이나 하고…. 지금 시대가 옛날처럼 민주화만 외치면 다 되는 때가 아니다. 당을 변모시켜야 한다. 당에 친노 패권주의가 있다고 치자. 내가 당권을 이어받았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더민주당의 탈당 사태가 중단된 건 탈당한 사람들 때문에 ‘하위 20% 컷오프’ 룰에 적용될 사람들이 다 채워졌기 때문이란 관측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거다. 룰은 적용돼야 한다. 룰은 엄격히 잘해 놓았던데….”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내세웠다. 김 위원장이 당선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결별하게 됐나.
“내가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건 탐욕이 너무 심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탐욕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둘째, 대통령들은 주변이 너무 복잡하고 그 사람들이 사고 쳐서 실패했는데, 박 대통령은 주변이 간단하다. 셋째가 중요한데, 박 대통령은 누구에게 신세 진 적이 없다. 그래서 이분은 제대로만 설계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결별이랄 게 뭐 있나. 선거에 당선됐으니 그냥 끝난 거지.”
―박 대통령의 3가지 장점에 대해선 지금도 생각에 변화가 없나.
“당선된 이후에는 역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참모그룹의 생각이 다르면 결국 (대통령도) 바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런 게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에게도 조언자 역할을 했는데, 안 의원은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에 그 사람은 정치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치하고 싶으면 국회부터 가라’고 했더니, ‘국회의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근데 국회의원이 돼서 요즘 하는 걸 보니 구정치인이 다 됐다. 정직성이 좀 결여돼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당을 만든다고 하다가 민주당과 합당했고, 일단 정당에 들어가면 서로 경쟁을 해서 결국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인데 여의치 않으니까 나가 버린 거 아닌가?” 하위 20% 컷오프 엄격 적용
―문 전 대표는 어떤가.
“정직하고 진정성이 있다. 다만 정치 경력이 일천하다. 실질적으로 초선 의원이니까. 사실 대선 6개월 남겨 놓고 공식 선언한 사람 아닌가. 6개월 선거운동 해서 1460만 표 얻었다는 건 대단한 성공이고 정치적 자산이다. 당 대표까지 됐는데, ‘내가 1460만 표 받았는데 다음엔 좀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세상이 변하고, 국민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문 전 대표에게 ‘변화하는 데 대한 적응을 못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각오하라’고 했다. 흔히 밖에서 ‘김종인이란 사람이 가서 문 대표 꼭두각시가 될 거다’ 하는 얘기 나오면 난 웃음밖에 나질 않는다.”
―불편한 질문을 좀 해야겠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사실 5·18 나고 인명 피해가 많이 나고 할 때 ‘이 사람들 큰일날 짓을 하는 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장 보좌관이란 육군 중령이 찾아와 ‘부가가치세를 폐지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 때 부가세 도입 작업을 해서 1977년부터 시행됐다. 부가세가 부마항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자 없애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는 시행 4년째여서 정착 단계에 들어갔는데, 그걸 없애면 세제에 엄청난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못 없애게 하려고 국보위에 들어갔다.”
―좌우명이 ‘자연의 주어진 여건대로 산다’라는데, 맞나.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려는 좌우명이 국보위 참여와 관련 있나.
“좌우명 맞다. 국보위 참여와는 관계없다. 나는 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데는 확신이 있으면 참여한다. 확신 없으면 안 하고.”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더 하겠다. ‘동화은행 뇌물수수 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노영민 신기남 의원을 징계하는 것이 형평에 맞느냐’는 얘기도 나온다(김종인은 199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비서관 재직 시 안영모 동화은행장에게서 2억1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추징금 2억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동화은행 사건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건이라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 사건을 말하면 나는 당시에 14대 비례대표 후보였다. 그 돈이라는 게 사실은 후보들에게 지원한 돈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내가 유일하게 김영삼 씨가 대통령 후보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분이 대통령 되면 일정한 보복을 받을 거란 걸 각오하고 있었고,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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