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일. 점심 즈음 그는 두 아들을 한 식당으로 불렀다. 그러곤 앞뒤 설명 없이 회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알렸다. 두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선언에 잠시 침묵하던 두 아들이 입을 열었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아버님, 훌륭하십니다”.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모든 걸 이해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이 섞여 뜨거운 청주를 석 잔이나 거푸 들이켰다.
그는 이튿날 새해 첫 임원회의에서 은퇴를 통보했다. 만류하는 임원들을 “음식은 상한 다음에 남겨주는 게 아니다”란 말로 설득했다. 법인카드 한 장을 반납하고 재무팀에서 인감과 개인통장을 돌려받는 걸로 퇴임 절차는 끝났다.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자(78·사진)는 그렇게 18년 동안 일군 회사를 떠났다.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벤처인’ 중 한 사람인 정 창업자가 최근 회고록을 냈다. 1983년 반도체 장비 제조사 미래산업을 창업해 국내 코스닥과 미국 나스닥에 각각 상장시킨 그는 2001년 경영권을 임직원들에게 물려주고 홀연히 은퇴를 선언했다.
정 창업주는 부인은 물론이고 2남 3녀의 자식을 회사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2001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515억 원을 KAIST에 기부하면서 사재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많이 남겨주는 부모는 자식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기회를 빼앗는 잔인한 부모”라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정 창업주가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5억 원을 달라고 했다. 아내는 그 돈의 용처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한 달쯤 후 정 창업주는 우연히 아내에게 온 한 우편물을 발견했다. 아내가 ‘익명’으로 기부한 5억 원으로 총 660명이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됐다는 맹인선교사업 관계자의 감사 편지였다.
정 창업주가 은퇴 15년 만에 회고록을 써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캐나다의 막내딸 집에서 지내고 있는 정 창업주는 “관심을 가져줘 고맙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지인을 통해 책을 펴낸 이유를 간단하게 전해왔다.
“그저 당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벤처 지망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 늙은이의 경험담이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실제 회고록은 벤처기업인이 가져야 할 경영철학과 윤리정신을 강조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특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부터 버리라고 강조한다.
사실 정 창업주 역시 실패로부터 시작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에서 18년간 일하다 갑작스레 해고된 그는 퇴직금의 반을 한 부품업체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엉겁결에 빚더미뿐인 공장을 인수했고 결국 1년 만에 회사 문을 닫았다. 1983년 남은 퇴직금 반으로 미래산업을 창업한 그는 친척들의 돈까지 끌어다 기술 개발에 쏟아부었지만 성공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옥과 같았던 1988년에는 수면제를 들고 청계산에 올랐다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에 “실패도 자산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 실패한 사람을 낙오자 취급한다. 그 때문에 모두들 실패하지 않으려고 현상 유지에만 집착한다. 벤처기업이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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