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영학관 내에 자리한 아시아여성학센터 사무실에서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여성운동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년을 앞둔 ‘아시아 첫 여성학 교수’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65)는 “성폭력 이전에 물리적인 폭력에 대해 여자들만 느끼는 특별한 두려움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밤길과 엘리베이터, 지하철은 30년 넘게 양성평등을 주장해온 60대 교수에게도 여전히 두려운 공간이었다. 장 교수는 “남성들은 학창 시절 주먹다짐부터 군대 얼차려 등에 노출되기도 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두 달 전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현장에 이어진 수많은 추모 행렬 뒤에도 ‘같은 두려움’을 가진 여성들의 공감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최근 가리봉동 노래방 살인사건의 범인은 모두 ‘남(남자)도 무시하는데 여자까지 무시해서’ 찔렀다고 한다. ‘남존여비’라는 집단무의식이 범죄로 발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여성의 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이라도 체험할 수 있는 ‘여성 감수성’ 훈련이 ‘히포시(he for she·여성을 위한 남성)’로 대변되는 페미니즘의 첫 단추라고 말했다. 그는 “1970, 80년대 한국 남성들은 ‘여성을 존중하는 친절하고 멋진 남성상’을 뜻하는 페미니스트로 소개하길 즐겼다”며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장 교수는 “여권이 많이 신장됐지만 아직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 시선 속에서 성매매 여성의 문제는 모든 여성의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성매매를 왜 하는지, 돈 주고 사는 성과 결혼할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본질적인 고민은 여성이 아닌 남자들의 몫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여성혐오’ 현상의 중심에 선 ‘일간베스트’ 회원 상당수가 경쟁에서 뒤처진 남성들이 아니라 번듯한 직장을 가진 중산층이라는 연구결과에도 주목했다. 장 교수는 “1960, 70년대 한국 경제를 일으킨 산업 역군으로 남성만 치켜세운 아버지 세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동시대 재봉틀을 돌리며 오빠와 남동생들을 교육시킨 여성들의 공헌은 등한시됐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노동자보다 힘든 민중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을 꼽았지만 장 교수는 현대를 살아가는 ‘워킹맘’들의 사정도 결코 낫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이를 함께 돌봐줄 대가족이나 마을공동체는 해체됐고 비싼 사교육, 층간소음 문제 등 신경 쓸 부분이 많아졌다. 높아진 교육수준에 여성이 느끼는 모순과 좌절은 과거보다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워킹맘 문제 해결을 위해선 근본적으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를 ‘양육’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 졸업 후 출산 육아 등 ‘마미 트랙’을 걷는 여성들이 자신의 꿈과 직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맞벌이에 그치지 말고 맞살림, 맞돌봄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1984년 한국 최초의 여성학과 교수로 부임한 장 교수는 자신이 32년간 양성평등의 산실로 키워온 이대에서 16일 정년 퇴임식을 갖는다.
“지난 30년 동안 페미니즘이 (남성 중심 사회에) ‘끼어들기’였다면 앞으로 30년은 남성의 공감을 이끌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새판 짜기’가 될 것입니다.”
히포시를 찾는 그에게서 인터뷰 내내 기자(he)의 이해를 인도해주는 ‘시포히(she for he)’의 여유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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