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땄지만 ‘대한인’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입니다. 한국의 올림픽 금메달 역사는 40년이 아니라 80년입니다.”
대한민국 올림픽 금메달 1호인 양정모 씨(63)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한국 스포츠가 이만큼 발전한 데는 선배들의 맥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뿌리’를 가슴에 새기면서 경기에 임해 달라”고 당부했다.
3일 부산 동구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는 선수 시절 펼쳤던 기술을 간간이 시연하며 1시간 반가량 꼿꼿한 자세로 건강함을 과시했다.
양 씨는 이날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뒤 1976년 8월 9일 동아일보가 마련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40주년 및 몬트리올 올림픽 한국선수단 개선 기념’ 행사 때 받은 은컵을 자랑하면서 “손 선생과 제가 제일 큰 것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은컵 사진을 소개한 그는 “동아일보와 한국 스포츠는 인연이 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청와대에서 열린 올림픽 귀국보고회 때 자신과 함께 서 있던 정동구 대표팀 코치가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체육대학’의 필요성을 제기해 설립됐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양정모는 올림픽과 한국 스포츠사에서 일부분일 뿐”이라며 “숱한 선배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금메달 획득도 가능했다”고 자신을 낮췄다.
양 씨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환이 서린 부산 중구 동광동 40계단 근처 ‘칠성방앗간’ 집 아들로 자랐다. 중학교 1학년 때 용두산공원 근처 한일체육관 앞을 지나면서 체구가 작은 사람들이 뒹구는 모습에 반해 ‘레슬링’과 인연을 맺었다. 자신처럼 덩치가 작은 사람도 경기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유도와 씨름에 일가견이 있던 부친의 영향도 컸지만 하고 싶은 운동을 하다 보니 양 씨의 레슬링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그는 1971년에 주니어 국가대표로 뽑힌 이후 1980년까지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면서 한국 레슬링을 이끌었다. 그는 “당시 레슬링 선수들이 일주일에 한 번 10∼15kg의 모래조끼를 입고 불암산을 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요즘이야 스포츠에 과학과 의학, 심리학, 마케팅이 접목되지만 성과를 내는 데는 혹독한 훈련만큼 좋은 과정이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시 체중 감량이었다고 회고했다. 양 씨는 컨디션 유지를 위해 태릉선수촌 생활 9년 동안 세끼 밥을 다 먹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동메달을, 두 차례 아시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다.
근황을 묻자 양 씨는 “나는 레슬러다. 레슬링과 나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다. 레슬링은 잘했지만 다른 분야에는 미흡한 점이 많아 아쉽다”며 “요즘은 이런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사진과 서예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양 씨는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과 조폐공사 감독 등을 지낸 뒤 현재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재능기부 공동체인 ‘희망나무 커뮤니티’의 이사장을 맡아 소아암 어린이 돕기, 위안부 할머니 위문공연 등 재능기부 활동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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