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로스쿨 학생들마저 변호사 시험에 매달리느라 통상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교수로서 이런 현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재판관으로 일한 장승화 서울대 교수(53)가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재판관 퇴임식을 앞두고 처음 말문을 열었다. 미국의 석연찮은 반대로 연임하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것보다 장 교수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건 수출의존도가 높은데도 통상 전문가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한국의 척박한 법학 교육 현실이다. 장 교수가 지난해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통상법 강의를 했을 때는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렸다. 정작 그가 몸담은 서울대 로스쿨에서는 수강생이 10명 남짓이다.
최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지금이라도 통상법 전문가 양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통상 전문가가 없는 법조계의 현실을 꼬집었다. 통상 분쟁이 벌어지면 해외 로펌에 많은 수임료를 내고 맡기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국내에서 전문가를 키우고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며 “기업이 자체적으로 통상 관련 이슈를 분석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정부 지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탁기 반덤핑 분쟁에서 한국이 이긴 것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통상 분쟁에서 얼마든지 다퉈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정당성과 명분이 있다면 눈치를 보지 않고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장 교수는 201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WTO 상소기구 위원에 선출됐다. 7명으로 구성된 WTO 상소기구 위원은 국가 간 무역분쟁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대법관’과 같다. 임기는 4년이다. 연임하려면 모든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장 교수의 연임은 무산됐다.
장 교수는 “올해 초부터 미국이 나에 대해 불만 또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재판관으로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굳이 나서서 오해를 풀려고 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와 경제계에서는 미국이 한국과의 세탁기 반덤핑 분쟁 판정을 앞두고 자국에 불리한 판결이 나올 것을 우려해 장 교수의 연임에 반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한국 전자회사들이 수출한 세탁기에 반덤핑 관세를 매긴 근거가 인정되지 않아 미국은 이달 7일 WTO 상소기구에서 최종 패소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 등과의 정치·외교적인 관계를 의식해 통상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최근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 흐름이 거세지고 있어 통상 분쟁이 더욱 늘어날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 교수는 당분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는 “4년간 WTO 본부가 있는 스위스를 오가느라 강의와 연구에 소홀했다”며 “기다려 준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강의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