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양궁 국가대표 김범철씨
17세때 뺑소니차에 치여 장애 얻어 9년간 집안서만 지내다 세상으로
양궁 만나며 새로운 꿈이 생겨… “당장 나와의 싸움에 도전하세요”
활시위를 당기는 김범철 주무관의 손짓이 능숙하다. 가슴 아랫부분을 쓸 수 없는 그는 활을 쏘다 행여 몸이 넘어지는 걸 막기 위해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묶고 활을 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4주 뒤면 국가대표 선수촌에 들어갑니다. 입촌 날짜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양궁 국가대표 김범철 씨(53)가 컴파운드(양궁에 쓰이는 활의 종류)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의 소속은 서울 금천구청이다. 하지만 운동을 전업으로 하는 실업팀 선수가 아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구청 민원여권과에서 민원인을 상대하는 현직 공무원이다.
그는 취미로 양궁을 시작한 지 13년 만인 지난해 말 국가대표가 됐다. 주중엔 일하고 주말에 활을 쏘며 실력을 키운 끝에 실업팀 선수들을 제치고 3위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는 다음 달 13일 선수촌에 입촌해 9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장애인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컴파운드 활시위의 장력은 약 20kg. 훈련이 안 된 일반인은 쉽게 당길 수도 없다. 하지만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만 겨우 움직이는 그는 활 쏘는 자세를 보여 달라는 기자에게 익숙한 듯 ‘뿌드득’ 활시위를 당겨 보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땐 하루에 12시간씩 활시위를 당겼어요. 운동 마치면 팔을 들기 어려울 정도로 어깨가 뻐근하죠.” 활시위 자국이 선명한 오른손 손가락을 역시 굳어 있는 왼손으로 매만지며 그가 말했다.
그는 가슴 아래가 마비된 중증 장애인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과 팔, 그리고 두 개의 손가락뿐이다. 날 때부터 몸이 불편하진 않았다. 운동을 즐길 만큼 건강했던 그는 17세이던 1981년의 여름, 몸의 자유를 잃었다. 뺑소니 교통사고였다. 동네를 걷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는데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1주일 만에 눈을 떴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몸을 살피니 별 상처도 없어 보였다. 그저 가슴 아래가 뻐근할 뿐이었다.
“목 신경을 다쳤어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죠. 한 달 지나면 다시 걷고 뛸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몸이 좀처럼 낫질 않고 설상가상 뺑소니 범인을 못 잡으며 병원비로 재산을 모두 썼죠. 사고 당하고 5년 뒤 화병으로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상상조차 못했던 비극이 연달아 덮쳐 오자 그는 집에 스스로를 가뒀다. 9년간 단 한 차례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서른이 가까워오고 나서야 ‘먹고살 길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1993년 그는 장애인 특채로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 직업을 갖고 사람을 만나며 그는 조금씩 활기를 찾아 갔다. 어릴 때 좋아하던 운동도 계속 해 보기로 했다. 적은 움직임으로 개인 기록에 도전할 수 있는 스포츠, 양궁을 만났다.
수원양궁장에서 취미 삼아 활을 쏘던 그는 점점 실력이 붙는 걸 느끼자 대회에 도전했다. 2014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올해엔 국가대표가 돼 양궁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코치, 감독의 지도를 받게 됐다. 그는 “체계적인 훈련이 처음이라 실력이 더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더 연습해 비장애인 선수보다 더 훌륭한 기록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와 ‘나와의 싸움’에 도전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은 하루를 살아 내는 자체가 힘겨운 과제라 그 이상의 도전엔 소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장애인들은 딱히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어요. 그냥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집 밖으로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찾아 매일 조금씩 해야 합니다. 그러면 꿈이 생기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이 생기거든요. 전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일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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