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8일 03시 00분


동서양 사상 아우른 ‘둥지의 철학자’
“철학은 인간이 쉴 수 있는 둥지”
예술철학 독보적… 詩作에도 몰두
저서 100권 출간 왕성한 활동

“소나무는/외솔길 숲속 소나무는/의젓하기만 하네/이유도 없이/뜻도 묻지 않고/그저 의젓하기만 하네.”(박이문·‘소나무 송(頌)’ 중에서)

동서양 철학을 아우른 인문학자이자 시인으로 ‘지성(知性)의 참모총장’으로 불려온 박이문(본명 박인희·미국 시먼스대 명예교수·사진) 포스텍 명예교수가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약 100권의 저작을 출간하며 왕성하게 활동한 고인은 철학은 인간이 답을 찾고 쉴 수 있는 둥지가 되어야 한다며 이른바 ‘둥지의 철학’을 추구했다.

고인의 시처럼 ‘의젓한 소나무’ 같은 삶이었다. 해외에서만 30여 년 동안 프랑스 철학과 영미 철학을 섭렵하며 인식론과 실존철학의 영역을 연구한 뒤 동양고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예술철학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냈고, 철학과 문학의 경계에서 시작(詩作)에도 몰두한 시인이었다. 평소 고인은 “오랜 방랑 끝에 ‘철학적 글쓰기’와 ‘시적 글쓰기’의 결합은 불가능하지만 그 꿈마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성의 그물망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시로 표현하고자 했고, 보편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들을 모두 잡아 이 세계를 설명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2014년경부터 기억력이 떨어지는 등 지병이 악화됐다. 지난해 2월 기자가 경기 고양시의 노인요양병원을 찾았을 때 기자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워했고, 그의 시를 읽자 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충남 아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6·25전쟁에 징집됐으나 폐질환과 영양실조로 쓰러져 의병제대했다. 피란 시절 부산에서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했고, 서울대 석사를 거쳐 1957년 이화여대에서 불문학과 전임교수로 발탁됐지만 1961년 프랑스로 떠나 소르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시먼스대 교수, 1980년 이화여대·서울대 초청교수, 1983년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985년 독일 마인츠대 객원교수, 1989년 일본국제기독교대 초빙교수, 1991년 포항공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연구와 교육을 했다. 인촌상(2006년 인문사회문학 부문),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2010년 교육공로), 제1회 탄소문화상 대상(2012년) 등을 받았다. 훗날 도쿄대 총장을 지낸 하스미 시게히코는 소르본대 학위논문 ‘말라르메가 말하는 이데아의 개념’을 보고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구나”라며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인의 전집(10권)을 지난해 발간한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는 “박 교수는 대화로 깨달음을 주었던 ‘한국의 소크라테스’이자 척박한 한국 인문학의 영토에서 자라난 지성의 거목”이라고 말했다. 독일 마인츠대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강학순 안양대 교수는 “세상 물정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성을 보이면서도 학문 논쟁을 할 때는 물러섬이 없었다”며 “한국 인문학의 사표(師表)와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유족으로 부인 유영숙 씨와 아들 장욱 씨(미국 거주).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6시 20분. 02-2227-7500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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