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의회서 ‘위안부 참상’ 증언… 명예회복 恨 못풀고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4일 03시 00분


위안부 피해 김군자 할머니 타계
생존 할머니 37명으로 줄어… 文대통령 “하늘서 평안을” 조화 보내
강경화 장관 등 빈소 조문 이어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사진)가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김 할머니는 생전 미국 하원 청문회에 나가 생생한 피해를 증언해 위안부 강제 동원 규탄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냈다. 김 할머니가 숨지기 직전까지 살았던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집 관계자는 “‘여장부’였던 할머니가 많이 그리울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 할머니가 숨져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7명이 됐다.

김 할머니는 1926년 강원 평창군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고아가 돼 친척집에 살다 16세이던 1942년 한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에 붙들려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 위안소로 끌려갔다.

김 할머니는 일본군에 맞아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왼쪽 귀 청력을 잃었다. 도망치려다 들켜 ‘죽지 않을 만큼’ 구타를 당했다. 몸 곳곳에 흉터가 남았다. 3년 동안 7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광복된 뒤 38일을 꼬박 걸어 두만강을 건너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다시 만났지만 결국 가정을 꾸리진 못했다. 혼자가 된 김 할머니는 가사도우미, 미제(美製) 물건 노점상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98년 72세가 됐을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집에 들어갔다.

2007년 2월 김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89) 등과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회가 연 인권보호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김 할머니 등은 참혹했던 과거를 적나라하게 증언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잔학성과 규모면에서 전례가 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라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김 할머니는 2015년 말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체결하자 “인정 못 한다. 우리를 너무 무시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듬해 ‘화해·치유재단’이 지급하는 돈도 받지 않았다. 이달 초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나눔의집을 찾았을 때도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눔의집 생활을 하며 받은 도움을 갚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0년과 2006년에는 “부모 없는 학생들 공부에 써 달라”며 총 1억여 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정부 지원금 등을 쓰지 않고 모아서 내놓은 것이다. 2015년에도 평소 다니던 성당에 1억여 원을 기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빈소에 화환을 보내고, 페이스북에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였다”며 “하늘에서 평안하시라”고 적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빈소를 찾아 “(위안부 합의에 대해) 흡족한 답을 못 얻으신 가운데 (돌아)가셔서 많이 안타깝다”며 고개를 숙였다. 영정 앞에 선 이용수 할머니는 “왜 그리 빨리 갔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할머니의 유골은 화장 후 나눔의집에 안치된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차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박성진 기자
#위안부 피해 김군자 할머니 타계#이용수 할머니#위안부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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