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가족이 지켜준 70대 할머니의 장기기증 약속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8일 03시 00분


뇌전문가 사위가 수술했지만 뇌사… “고인 뜻 받들자” 3명에 새 생명

허준 명지성모병원 의무원장이 장모인 김연임 씨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명지성모병원 제공
허준 명지성모병원 의무원장이 장모인 김연임 씨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명지성모병원 제공
머리뼈를 열자 무수한 뇌혈관이 드러났다. 1mm의 오차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뇌출혈 수술. 하지만 메스를 쥔 허준 명지성모병원 의무원장(44·신경외과 전문의)은 자꾸 눈물이 나와 시야가 흐려졌다. 뇌출혈 환자 수천 명을 보아온 그의 직관이 ‘이 환자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는 9월 28일 결국 뇌사에 빠졌다. 이 환자는 허 원장의 장모 김연임 씨(71)였다.

김 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 여러 봉사활동을 했다. 퇴직금과 용돈을 모아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지만 가족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몇 해 전 김 씨는 치매와 함께 뇌혈관이 약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준이(허 원장)와 인이(손자) 이름은 까먹으면 안 되지”라며 재활치료에 전념했다. 그렇기에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김 씨의 뇌사에 더욱 망연자실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채 병실에 누운 김 씨의 곁을 지키던 허 원장의 아내 정현주 씨(44)는 김 씨가 10여 년 전 장기 기증을 서약한 사실을 떠올렸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을 통해 장기 기증을 희망한 사람은 뇌사에 빠지면 안구(각막), 간, 콩팥, 심장, 췌장 등 9개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 다만 유가족이 반대하면 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장기 기증은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 김 씨의 가족은 화장(火葬)해 달라는 고인의 당부조차 지킬 엄두가 나지 않아 장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김 씨가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지막 소원만큼은 들어드리자”며 마음을 모았다. 고령인 김 씨의 장기가 기증에 적합한지가 문제였지만 이식 수술을 맡은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은 ‘간과 콩팥이 건강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덕에 김 씨는 40, 50대 환자에게 콩팥을 1개씩 나눠줄 수 있었다. 간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부산의 한 70대 환자에게 이식됐다. 이식 환자 3명은 모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쳐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간소한 장례식을 원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빈소를 차리지 않고 부의금도 사양했다. 그렇게 조용한 장례식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입관식에 김 씨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는 한 목사가 찾아와 “고인 덕에 신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70대 할머니의 장기기증#허준 명지성모병원 의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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