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별 후 행복했나요…잘가요, 쿠” 이구 영결식 멀리서 지켜본 줄리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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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12월 6일 10시 09분


사진=YTN 캡처
사진=YTN 캡처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1931∼2005)의 부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의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이구 부부의 안타까웠던 삶도 재조명받았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英親王·이은·李垠)과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둘째 아들인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후손으로 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구는 1950년 1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한 뒤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다 1957년 8세 연상의 독일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를 만났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곳은 세계적인 미국 건축회사인 아이엠페이의 맨해튼 사무실. 뉴요커였던 그녀는 이 회사의 잘나가던 직원이었고 이구는MIT 건축학과를 졸업한 신입 직원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이구는 멀록 여사에게 처음으로 춤을 청했고 두 사람은 1958년 10월 어느 비 오던 날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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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부부는 1963년 한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게 됐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사업을 시작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줄리아 여사가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종친들은 끊임없이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77년 별거에 들어갔고 결혼 생활 24년 만인 1982년 파경을 맞았다. 이후 이구는 일본으로 떠났다.

줄리아 여사는 이후에도 혼자 한국에 머물며 장애인 복지사업을 벌이고 의상실을 운영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1995년 미국 하와이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이후 이구는 지난 2005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타계했다. 향년 74세. 이로써 대한제국의 적통(嫡統)은 끊겼다.

당시 내한해 서울 강남 모처에 머물고 있던 줄리아 여사는 이구의 타계 소식을 접하자 “쿠를 꼭 한번 다시 만나 ‘당신 (나와 헤어진) 그동안 행복했나요, 안 행복했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내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는데…”라며 “여덟 살 아래인 쿠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줄리아 여사는 이구를 그의 영문 이름(Ku Lee)인 ‘쿠(Ku)’라고 불렀다.

이구의 영결식은 2005년 7월 24일 서울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앞에서 열렸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온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지만 정식으로 초청은 할 수 없다”며 영결식에 줄리아 여사를 부르지 않았다.

줄리아 여사는 멀리서 전 남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당시 줄리아 여사는 서울 종묘공원 맞은편 인도에서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채 노제(路祭)를 위해 멈춰 선 운구행렬 속의 대여(大輿·국상에 사용하는 큰 가마)를 지켜보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됐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목에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모자를 눈 위까지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이는 1982년 두 사람이 이혼한 후 처음이자 마지막 해후였다. 줄리아 여사는 시민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언론사의 취재 카메라가 따라붙자 황급히 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영결식 전날까지도 줄리아 여사는 “내가 남편의 장례식에 가면 괜히 언론보도의 초점만 흐려진다”며 지인들에게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영결식 당일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멀리서나마 전 남편을 배웅했다.

당시 지인들에 따르면 줄리아 여사는 17일 이구의 별세 소식을 듣자마자 현재 머물고 있는 서울 강남의 거처에 고인의 젊었을 때 사진으로 만든 영정을 놓은 간이 분향소를 차려 고인을 추모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2년여 뒤, 줄리아 여사는 11월 26일 미국 하와이의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줄리아 여사는 거동이 불편해 누워만 있다가 쓸쓸하게 눈을 감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정아 동아닷컴 기자 cja091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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