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식민 치하에 태어난 동아일보가 2018년 1월 26일자로 지령(紙齡) 3만 호를 발행한다. 97년 9개월여, 매일 한 호씩 발행한 신문이 나이로 따져서 3만 고지에 올라선다. 돌이켜 보면 이 지점에 이르는 역정(歷程)의 지난날에 도사린 아픈 사연이 먼저 떠오른다.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던 여러 차례의 정간이다. 발행을 멈춘 기간이 없었다면 3만 호의 기록은 9년이나 10년 전에 달성됐을 것이다. 꺾이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오늘에 이르렀다.
3만 호는 독자와 국민의 성원, 제작과 경영에 참여한 언론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정(結晶)이다. 글을 쓴 수많은 논객과 문인들, 경영을 뒷받침한 광고주들도 3만 호 이어달리기의 주자들이다. 그래서 3만 호는 동아일보의 경사에 그치지 않고 독자와 국민이 함께 축하할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던 암흑의 날들이 네 차례였다. 정간당한 날을 합하면 609일, 1년하고도 약 8개월이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었던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죄로 정간당했던 277일(1936년 8월 29일∼1937년 6월 1일) 동안은 신문이 나올 수 없었던 가장 긴 기간이었다. 1940년 8월 10일에는 총독부의 강압으로 폐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아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일제 패망 후 약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1일에 살아났다. 신문이 발행될 수 없었던 5년 넘는 기간은 날짜로 계산하면 1937일. 시간이 흘러도 지령은 멈춰 있었다.
광복 후 복간은 됐으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이 점령했던 3개월 사이에 또다시 신문이 나올 수 없었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지 4일 뒤 7월 2일부터는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라는 좌익신문만 발행되었다. 김일성은 신문을 이용한 침략도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그 사이 동아일보는 사원 16명이 북으로 끌려갔다. 편집국장을 비롯해 부장, 기자 등이 포함돼 있었다. 신문사 가운데 가장 많은 사원의 희생이었다. 1·4후퇴 직후에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일시 다른 신문의 시설을 이용하여 타블로이도 2면 손바닥만 한 지면으로 신문을 발행한 때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8월 19일 1만 호를 발행했다.
권력의 탄압으로 신문이 위기에 처했던 경우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유신 시절 광고탄압이 한 본보기였다. 1974년 12월에 시작돼 이듬해 7월까지 만 7개월 사이에 권력은 동아일보, 동아방송(DBS), 여성동아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광고주를 압박해 신문을 말려 죽이려고 했다. 광고 해약은 유신정권의 언론 목조르기였다. 동아일보는 심각한 영업 손실을 보았으나 끝까지 버티면서 위기를 넘겼다. 수많은 독자가 ‘격려광고’로 성원했고, 발행부수도 늘어났지만 경영상 타격은 컸다.
권력의 언론 탄압은 민주화 이후 더욱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진화했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 동아일보를 비롯한 특정 언론사를 표적으로 삼아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이해 2월 8일 국세청은 23개 중앙언론사 세무조사를 일제히 시작한다고 발표했는데, 주된 표적은 동아일보 등 메이저 언론사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때를 맞춰 공정거래위원회는 불공정거래 조사에 나서고 언론사와 사주를 고발하고 구속으로 이어지는 언론 역사 초유의 광풍이 몰아쳤다.
동아의 2만 호는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6년 10월 1일이었다. 3만 호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길에는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던 빈 공간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지령은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해서 증가는 더디기만 했다. 앞으로는 지난날 같은 탄압과 장애를 만나지 말고 더 빠르고 정확한 걸음을 기대한다.
1만 호 지면에는 이런 다짐의 말이 있었다. “1호가 1만 호의 장래를 약속해 주었음과 같이 오늘의 1만 호가 앞날의 10만 호, 100만 호의 무궁한 발전을 약속해 주리라는 것을 스스로 염원하면서….” 동아의 10만 호, 100만 호를 기다리면서 우선 3만 호를 다시 한 번 경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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