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열 냥이면 만평은 아홉 냥이란 말이 있다. 암울하고 억눌렸던 시절, 동아일보 만화는 아홉 냥짜리 값을 해냈다.”(손상익 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지령 3만 호를 맞은 동아일보의 역사는 한국 시사만화의 본류를 열었다. 촌철살인의 풍자는 억압의 시대를 살아가던 독자들에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쾌감을 선사했다.
동아 만화의 막힘없는 붓끝은 1920년 4월 1일자 김동성 기자가 그린 창간호 만평에서부터 예견됐다. 동아일보를 상징하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손을 위로 뻗어 ‘단군의 건국이념’ 휘호가 쓰인 액자를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동아일보가 조선의 독립을 이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만평이었다.
만화는 총독부의 악랄한 한민족 언로 말살에 맞서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일본군으로 넘치는 한반도, 악마에게 물어뜯기는 조선 청년을 그린 만평이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게재 금지 처분을 당했다. 삽화가 청전 이상범 화백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만화는 계속됐다. 1955∼1980년 연재된 4컷 만화 ‘고바우영감’은 신문 시사만화의 전형이 됐다. 뭉툭한 코, 납작 머리에 머리카락 한 올의 ‘고바우영감’은 외모와는 달리 부당한 권력엔 깐깐하고 날카로웠다. 1958년 1월 23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는 변소의 똥 푸는 사람마저 귀하신 어른 대접 받는다’며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풍자해 김성환 화백은 시사만화가로는 처음으로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이후 ‘동아희평’(백인수) ‘나대로 선생’(이홍우) 같은 정치 시사만화뿐만 아니라 어린이 학습만화부터 성인용 연재물까지 다양한 만화가 등장했다. 2002년부터 연재된 허영만의 ‘식객(食客)’은 정치풍자 위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중적 장르 시도로 종합일간지 신문만화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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