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교동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10월쯤으로 기억된다. 동아일보사는 내가 살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97번지에서 10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있었다. 오후 서너 시 신문사 후문으로 달려가면 벌써 신문팔이 소년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철커덕 철컥” 하는 기계음과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윤전기 위엔 이불보다 큰 흰 종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원기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얗던 종이가 시커먼 잉크를 뒤집어쓰고 절단기에서 두부처럼 잘라져 놓인다. 동아일보다.
난 신문을 바라보며 내가 단골로 가야 할 거리를 되짚는다. 갓 받아 든 신문을 왼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운다. 신문은 따끈따끈했다. 바람을 가르듯 달리기 시작한다. 가슴이 뛴다. 신문 나온 걸 외치며 인사동, 관훈동, 낙원동, 파고다공원을 휘젓는다. 그때까지 다 안 팔리면 길 건너 관철동, 수표동 그리고 동대문까지가 내 관할 구역이다. 잘 팔릴 땐 하루 두 탕을 뛴다. 후문으로 달려가 또 한 차례 신문 배당을 받아 팔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우리 집 신문이었다. 부친께서는 광복 후 조선서적인쇄 주식회사 사장을 지내신 관계로 언론과도 관련을 맺은 분이셨기에 항상 신문을 접하고 자랐다. 집에선 일 년에 한 번씩 도배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초배지는 모두 동아일보였다. 그래서 우리 집은 다락에도 동아일보, 벽에도 동아일보, 방바닥까지 사방팔방 동아일보 천지였다. 1948년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님에게 언문과 한문을 배웠다. 교과서는 바로 동아일보였다.
경복고 졸업 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뒤 1962년 서석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동아일보 사설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강의를 진행하셨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던 나로서는 강의 들으랴, 사설 읽고 정리하랴, 동숭동(태릉선수촌 이전 국가대표선수 훈련소)에서 대표선수 훈련을 하랴 늘 바쁜 나날이었지만 동아일보는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이 시기에 동아일보 사설은 압권이었다. 특히 한국이 근대화하려면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돼야 한다는 논리적 전개를 펼쳤다. 또 국제적, 사회적 모든 분야에 대학생으로서의 식견을 넓히는 데 최고의 벗이었다.
“야∼ 방열, 너 기자가 찾고 있어. 빨리 학과실로 가 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졸업식 날 농구 경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뭔 기자가 날 찾나 싶어 급히 달려갔다. 뜻밖에도 동아일보 기자를 만났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1965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해외 나가서도 꼬박꼬박 리포트, 스포츠 중에 면학한 학사대표선수’라는 제목이 달린 내 사연이 실렸다. 벌써 5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동아일보는 요즘 국내에서 강조하는 공부하는 운동부에 일찌감치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92년 선수로, 지도자로 45년을 보낸 코트를 떠나 대학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걸을 때도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1995년 11월 20일 동아일보 체육부로부터 겨울철 농구 시즌을 맞아 ‘방열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농구칼럼을 써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며칠 후 첫 칼럼을 넘겨 달라는 부탁에 한 치의 거리낌 없이 “네, 잘 알겠습니다”라고 순순히 답했다. 전화를 끊고 두려움이 다가왔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못 잡은 채 머리가 하얘졌다. 앞으로 약 5개월 동안 매주 한 꼭지씩 피 말리는 나와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고, 왜 동아일보에 “노”라고 말하지 못했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20회 가까이 매주 칼럼을 쓰면서 스스로 배운 것도 많았다.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년 1월 3만 호 발행을 앞둔 동아일보와 관련된 일화에 대한 원고 청탁을 해 왔다. 또 한 번 나는 머뭇거림 없이 “글쎄요∼ 동아는 나와 여러 가지로 인연이 있는데”라며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만사 제쳐 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 동아일보는 여전히 나를 새롭게 일깨우고 있다.
P.S. 동아일보, 아∼ 그대는 정녕 오늘의 내가 있도록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도 내가 체험했던 감명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소통과 공감을 이어가길 기원하면서 이 자리를 빌려 3만 호 발행을 축하하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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