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모험이었다. 나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서로에게 그랬다. 만화 ‘식객’은 2002년 9월 2일부터 2008년 12월 18일까지 연재했다. 약 6년 3개월. ‘꼴’은 2008년 1월 1일 시작해 2010년 3월 31일 마무리. 그 또한 2년 3개월. 겹치는 시기를 빼도 7년이 훌쩍 넘는다. 게재 횟수로는 1438회에 542회. 2000회에서 딱 스무 날이 모자란다. 우리나라 일간지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나날. 출발은 쉽지 않았다. ‘식객’은 기획만 3년 가까이 공들였다. 한국에 없던 음식만화 지평을 열겠다는 포부가 컸다. 제안이 오간 다른 신문들은 난색을 표했다. 매일 큰 지면을 할애하는 게 어찌 쉽겠나. 동아일보 역시 고민이 컸을 게다. 결정 난 뒤엔 화끈했다. “맘껏 펼쳐보시라.” 소재도 방향도 전적으로 작가를 믿어줬다. 신뢰는 끝까지 변치 않았다.
딱 한 번. 동아일보가 요구 사항을 전해 온 적 있다. 만화 글이 기사 글씨보다 작아 읽기 힘들단 독자 의견이었다. 수긍은 갔다. 다만 한 컷 안에서 문장을 끝낸다는 원칙을 평생 지켜왔다. 조심스레 고충을 토로했다. 역시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대화가 통하니 맘에 응어리질 일이 없었다.
이제 와 털어놓는다. 연재를 중단하려 했던 때가 있다.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다 보니 독자들의 반응을 알 길이 없었다. 요즘처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발한 시절도 아니니. 시류를 못 읽었나 보다 자책도 들었다. 광화문을 찾아갔다. 오명철 당시 문화부장이 보자마자 내 손을 잡아챘다.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편집국을 끌고 다녔다. 정신없이 쏟아지던 악수와 격려. 짐짓 정색하곤 오 부장을 타박했다. “이럴 거면 진작 좀 알려주지.” 그날 마신 막걸리 맛은 지금도 생생하다.
동아일보와 보낸 세월은 축복이었다. 모든 작품이 귀한 자식이지만 ‘식객’과 ‘꼴’은 남달랐다. 배우는 즐거움에 그리는 기쁨이 넘쳤다. 뭣보다 식객 취재는 나갈 때마다 뿌듯했다. 약속 없이 찾아가도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TV 촬영 오겠다는 거 다 뿌리쳤어. 동아일보 식객은 다르지. 어찌 그리 우리 속내를 잘 아는지. 아침마다 기다려. 고마워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 한 식당 주인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신기하다. 연재 처음엔 원고를 문하생 손에 들려 보냈다. 택시에 놓고 내려 부리나케 다시 그리기도 했다. 다음엔 팩스로 전송했다. 이후 그림 파일을 이메일로 보냈다. 끝자락엔 종이가 아닌 그림 전용 태블릿PC로 그렸다. ‘식객’과 ‘꼴’엔 만화 작업의 변천사가 녹아 있다. 그렇게 세상이 급변하는 동안, 다행히 마감은 한 번도 어긴 적 없다. 7년 내내 저녁 술자리도 마다했다. 무척 애지중지한 연애였다.
동아일보 연재는 작가에게도 자랑거리였다. 백지광고, 박종철 특종…. 게다가 이젠 지령 3만 호라니. 장구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가. 덕분에 ‘국민 만화가’란 쑥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연재 내내 ‘식객과 함께 만화 인생을 끝내는 것도 아름답겠구나’라는 소망을 품었을 정도다.
‘식객’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옛날 시골 마을에 가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나지막한 돌담 위로 옆집과 음식을 나눴다. 별게 없으면 된장 고추장이라도 퍼다 줬다.’ 한국 음식은 그런 정이 담겨야 요리가 완성된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그게 만화를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였다. 동아일보와 나눈 것도 그런 교감이었다. 한번 맺은 정분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또 다른 모험을 향한 꿈이 꿈틀거린다. 언젠가는 옛날처럼 종이에 만화를 그릴 것이다. 힘들어도, 펜이 주는 감촉에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마지막으로 일간지에 싣고 싶다. 아침마다 침 묻혀가며 신문을 펼쳐보던 기억. 잉크 냄새가 손끝을 타고 번지며 작품과 마주한 순간. 그만큼 상쾌한 차 한 잔은 아직 만나보질 못했다. 그런 날이 다시 온다면, 선택은 당연히 동아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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