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호에 이르는 동아일보의 족적에는 취재 현장을 지키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기자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인 장덕준 기자(1892∼1920)는 한국 언론사에서 첫 번째 순직 기자로 기록됐다. 1920년 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리자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이었던 장 기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10월 간도 현지로 떠났다. 당시 본보는 무기정간을 당해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주위에서는 위험하다며 간곡하게 말렸으나 “속간이 되면 반드시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는 장 기자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11월 초순 룽징(龍井)에 도착한 장 기자는 일본 영사관과 군사령부를 찾아가 학살의 진상을 추궁했고, 한 여관에 묵었다가 일본군과 함께 떠난 뒤 실종됐다. 여러 기록은 그가 일본군에 피살됐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장 기자는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그로부터 77년 뒤인 1997년 7월 5일 본보 출판국 신동아부 이기혁 기자가 장 기자가 실종된 곳과 멀지 않은 중국 훈춘시 남방 두만강변에서 접경지역 취재 중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34세였다.
생사가 교차하는 베트남전을 종군 취재하다가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8일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디안에 있던 국군비둘기부대를 방문해 취재하고 모터사이클로 혼자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베트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했다. 31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 기자는 베트남 전선에서 숨진 유일한 한국인 기자다.
이중현 본보 사진부 기자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대통령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다.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인으로 순직한 한국인은 이 기자뿐이다. 여러 차례의 보도사진전에 입상했고, 평소에도 취재 의욕이 남달랐던 그였다. 테러 당일에도 가장 앞줄에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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