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코스 처음 뛴 동아마라톤서 3위… ‘몬주익 금메달’의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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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아일보]<12>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1991년 3월 17일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에서 김재룡, 이창우에 이어 3위로 골인하고 있는 황영조 감독(사진 왼쪽). 동아일보DB
1991년 3월 17일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에서 김재룡, 이창우에 이어 3위로 골인하고 있는 황영조 감독(사진 왼쪽). 동아일보DB
1991년 3월 1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을 출발해 경기 성남을 돌아오는 제62회 동아마라톤에 출전했다. 5000m와 1만 m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나는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할 훈련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당시 소속팀(코오롱) 이창우 선배 옆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도와주며 20km까지만 경험 삼아 달릴 예정이었다. 20km를 달렸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약 30명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달리다 보니 경쟁이 붙었고 나도 덩달아 뛰었다. 30km가 가까워졌을 때 다른 선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당시 후배들이 잘 달리면 선배들이 기분 나빠 하며 발을 거는 잘못된 관행이 있었는데 내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까진 무릎을 털고 일어나자 선두그룹은 50m 앞을 달리고 있었다. ‘어차피 20km만 달릴 것이었으니 그만 뛸까’ 고민하다 그래도 이창우 선배의 우승을 돕기 위해선 선두권을 흔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력질주로 다시 선두그룹에 합류한 뒤 이창우 선배에게 눈짓을 하고 스퍼트를 했다. 사실 그때 난 스퍼트 하나는 잘했다. 한 2km 달렸을까. 다 떨어지고 이창우 선배와 김청용 선배(제일제당)가 따라왔다. 내 역할을 다했으니 이창우 선배 뒤로 빠져줬다. 그런데 두 선배가 잘 나가질 못했다. 잠깐 페이스를 줄인 사이 몸은 다시 회복이 됐다. 그래서 계속 따라갔다. 김청용 선배가 떨어지고 김재룡 선배(한국전력)가 따라붙었다. 나와 김재룡, 이창우 선배 3명이 선두권을 형성했다.

이제 와서 얘기인데 마지막에 욕심을 좀 냈으면 우승도 가능했다. 하지만 김재룡, 이창우 등 당시 쟁쟁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는 기분에 취해 있었다. 170여 m를 앞두고 김재룡 선배가 스퍼트 했을 때 아차 싶었다. 내 주특기가 스퍼트인데…. 그때 뒤쫓아 갔는데 역시 풀코스 연습을 하지 않아서인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 1등과 1초 차인 2시간12분35초로 3위, 이창우 선배와는 동타임이었다.

동아마라톤 3위로 내 인생은 바뀌었다. 한마디로 급이 달라졌다. 완주하기도 힘든 풀코스에 처음 도전해 3위라니. 당시 동아일보가 새겨진 금반지와 세탁기를 선물로 받았다. 반지는 은행 금고에 넣어 둘 정도로 애지중지 잘 모시고 있다. 세탁기는 시집간 누나에게 선물로 줬다.

황 감독이 겨울 훈련지인 강릉의 한 식당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나온 동아일보 8월 10일자 1면 지면이 든 태블릿PC를 들고 웃고 있다. 강릉=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황 감독이 겨울 훈련지인 강릉의 한 식당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나온 동아일보 8월 10일자 1면 지면이 든 태블릿PC를 들고 웃고 있다. 강릉=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동아마라톤 3위라는 ‘간판’은 나를 그해 7월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만들어줬다. 2시간12분40초로 우승했다. 거칠 게 없었다. 그해 10월 일본 규슈 역전 경주에 초대받았다. 1구간에서 일본의 간판 선수들을 따돌리고 1등을 했고, 중간에 약 15km 구간에서도 우승했다. 대회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날 좋게 보자 ‘내년 벳푸오이타 마라톤 때 초대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1992년 2월 벳푸오이타 마라톤에 초대받았고 2시간8분47초로 2위를 했다. 당시 한국 마라톤의 꿈이 ‘2시간10분 벽’을 깨는 것이었는데 2시간8분대라니…. 한국 마라톤계가 놀랐다. 그리고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을 넘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을 제패했던 손기정 선배에 이어 56년 만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나는 일약 영웅이 됐다.

동아마라톤 3위가 없었다면 오늘의 황영조는 있을 수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아마라톤은 모든 선수의 꿈이다. 꼭 달리고 싶고 우승하고 싶은 대회다. 그 대회에 처음 도전해 3위를 했다. 난 그때부터 그 무엇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동아마라톤이 만들어준 셈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선발전으로 열린 제67회 동아마라톤이 은퇴 무대가 됐다. 26km 지점에서 발바닥이 찢어졌다. 신발을 벗어 보니 피가 흥건했다. 당시 걷다시피 29위로 골인했다. ‘전년도 가을에서 당해연도 3월까지 기록으로 대표를 선발한다’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선발 규정에 따르면 난 1995년 가을에 뛴 기록으로 4위였다. 3명만 출전하는 올림픽에 갈 수 없는 상황. 솔직히 ‘황영조 정도면 선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는데 연맹은 날 부르지 않았다. 올림픽을 위해 달려왔는데…. 더 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퇴했다. 공교롭게도 마라톤 데뷔와 은퇴 무대가 동아마라톤이 됐다. 어떻게 동아마라톤을 잊을 수 있겠는가.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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