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법대생이 되었다. 유신시대 개막 한 해 전이다. 동기들은 전북 진안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올라온 나에게 ‘진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진안 촌놈, 진짜 촌놈의 줄임말이다. 농이 많이 섞인 별칭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에겐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힘겨운 과정을 거쳐 입학한 터라 포부도 컸다. 하지만 세상은 평온하지 않았다. 3번째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독재를 공고화하기 위해 유신개헌을 밀어붙였다. 고대신문(고려대학보) 기자로 활동하던 대학 2학년 때다.
당시 동아일보는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논조로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나 있었다. 반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청년 지식인들에게 동아일보는 시대를 읽는 창이었다. 우리는 동아일보를 읽고 토론했고 그러한 시각은 다시 학보와 대자보에 투영됐다.
자연스레 유신체제에 부역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법조인의 꿈을 접고 반독재 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어울렸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선거 구호는 ‘친진보 탈보수’였다. 계엄 정부에 저항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교문 앞에는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을 만큼 삼엄한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언론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터졌다. 정권이 동아일보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광고주들을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과 독자들은 자유언론 격려 광고로 동아일보를 응원했다. 당시 곤궁한 고학생이었던 나 역시 친구들과 십시일반 뜻을 모아 백지광고에 동참했다.
국민의 뜨거운 성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많은 기자들이 옷을 벗어야 했다. 신입기자 채용계획도 백지화됐다. 동아일보 기자가 되어 권력이 아닌 국민의 편에서 펜을 들고자 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깊은 좌절감에 미뤄둔 군입대를 단행했다. 당시 교제 중이던 지금의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렇게 엄혹했던 유신체제는 나와 동아일보의 인연을 갈라놓았다. 벌써 4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다. 내가 한때 동아일보 기자를 꿈꿨던 것은 민족신문이라는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수차례 정간을 당했고, 1940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을 빌미로 폐간당할 만큼 우리 겨레의 마음과 입장을 대변해왔다. 광복 후에는 독재정권에 할 말을 하는 정론지로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최근 ‘1987’이란 영화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민주화의 분수령이었던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린 것도 동아일보다. 당시 박종철 특종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황열헌 기자는 지금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참 묘한 것 같다.
초선의원 시절에는 동아일보가 여야 1인씩을 선정한 의정활동 우수 국회의원으로 뽑혀 동료 의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9대 국회부터는 동아일보 본사 사옥이 위치한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서울국제마라톤에도 매년 함께해 왔다.
비록 동아일보의 가족은 되지 못했지만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세계관을 형성해준 고마운 존재였고, 정치인이 된 지금도 동아일보를 통해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요 문제에 대한 시각을 정리하고 있다.
2018년 1월 26일 동아일보가 지령 3만 호를 맞는다. 임시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이 걸어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가, 영욕의 세월이, 민초들의 희로애락이 모두 그 속에 절절히 녹아 있다.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로 내세웠던 동아일보가 3만 호 발간을 계기로 다시 초심을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든든한 길잡이이자 8000만 겨레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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