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개의 형형한 눈빛들이 1920년 7월 12일 동아일보 3면을 뒤덮었다. 주인공은 최남선 송진우 손병희 최린 현상윤 한용운을 비롯한 3·1운동 민족대표 48인.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관련 공판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보도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해외로 피신한 김병조와 구금돼 사망한 양한묵을 뺀 31명에, 작성 및 배포에 적극 참여한 박인호 등 17명이 포함됐다.
지면 편집은 오늘날 봐도 강렬하고 파격적이다. 사진 아래 “작년 삼월 일일에 탑골공원에서 만세소리가 일어나며 명월관 지점 제 일호 실에서는”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눈빛만큼이나 담담하면서도 결연한 기운이 글자마다 묻어난다.
3·1운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동아일보는 운동의 정신을 잇는 데 앞장섰다. 창간 한 달 뒤인 1920년 5월 15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수사하는 일제 경찰이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악랄하게 자행했다는 피고인들의 법정진술을 그대로 소개했다. 본보의 2차 무기 정간도 1926년 3·1운동 7주년에 소련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축전을 번역해 그해 3월 5일자에 실었다가 당했다.
광복 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미처 다루지 못한 3·1운동의 진면목을 다시금 조명하기 시작했다. 복간 두 달 만인 1946년 2월 ‘삼일기념 전기(前記)’ ‘삼일운동의 회상’ 등을 연재했다.
“천안만세주동자로 7년 구형을 받은 어린 유관순의 법정 투쟁도 또한 모질었다.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벌할 권리도 없다.’ 유관순은 이런 저항으로 법정모독죄까지 가산되어 여성 최고의 7년 징역형을 받았다.”
3·1운동이 50주년을 맞은 1969년 게재한 특집기사 ‘민족의 함성, 3·1운동’의 일부다. 독립운동가의 법정 투쟁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동아일보가 그해 발간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은 오늘날까지도 연구자들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본보 창간 45주년을 맞았던 1965년에는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키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1970년대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이 사업은 1980년대에도 계속 추진했다. 1989년에는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