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8월 7일 동아일보 1면에 사고(社告)로 실린 서체 모집 공고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서체 공모로서 독자 친화적인 신문을 만들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당시 공모에선 구약성경 개역에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4년간의 실험 끝에 1933년 4만여 종에 이르는 독자적인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를 개발해 1933년 4월 1일자 신문부터 6·25전쟁 때까지 사용했다.
가독성 높은 서체로 인기를 끌자 각종 인쇄·출판업체에서도 동아일보체를 구입해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은 동아일보사에 보관된 활자를 가져가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활자로 1958년까지 사용했다.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미국의 발간물에서까지 사용될 정도였다.
아름다운 글씨뿐만 아니라 활자를 종이에 찍어내는 최고의 윤전기 역시 동아일보와 함께했다. 1920년 4월 1일 창간 당시엔 일본에서 주문한 윤전기가 도착하지 않아 외부에 인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조판한 곳이었던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을 비롯해 당시 경성에서 가장 컸던 대동인쇄소 등에 인쇄를 의뢰했다.
1920년 7월 동아일보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간당 2만 장을 찍어낼 수 있는 마리노니 윤전기를 구입했다. 인쇄 능력은 시간당 2만 장으로 당시 서울에서 사용된 평판인쇄기의 능력이 시간당 2000장이었던 것에 비해 10배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1958년 9월에는 시간당 10만 장을 인쇄하는 국내 최초의 반자동식 윤전기인 독일의 ‘알버트’ 윤전기를 도입했고, 1978년 6월 3일자에서 처음으로 컬러 지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4년엔 당시 몽골과의 문화 교류사업의 하나로 동아일보의 윤전기를 몽골 최대 일간지 ‘아르틴 에르히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