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닌 조직에 충성하라’는 말이 있음에도 나는 ‘사람’을 보며 같이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민족 정론지를 표방하는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고 광복 후엔 불합리한 정권에 맞서 왔다. 이렇게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옳은 일’을 추구하다가 수차례 폐간 위기를 겪은 동아일보를 만들고 지켜온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소말리아 해적의 총탄 6발 이상이 예비역 해군인 석해균 선장의 몸을 꿰뚫어 부수고 지나간 2011년 1월, ‘동아일보 사람’들은 나를 찾았다. 석 선장의 수술은 밤을 새워 새벽녘에야 끝났는데 석 선장이 생사를 오가는 중에도 중증외상 환자는 끊임없이 밀려 왔다. 난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고 피곤이 온몸을 짓눌렀으나 관성으로 움직이듯 칼을 들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수술방을 나와 사무실로 걸음을 옮길 때 보호자 대기 의자에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있는 박민우 기자(현 카이로 특파원)를 보았다. 석 선장을 취재하기 위해 병원에 온 동아일보 수습기자였던 그는 며칠을 병원에서 먹고 자는 일명 ‘뻗치기’를 했다.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고 난 간호사에게 말해 담요를 덮어 주었다.
난 박 기자가 석 선장의 상태와 같이 파편 같은 흥밋거리만 좇으며 단편적인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병원 내에서 기거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에게 “기자는 기사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엉망인 중증외상환자 치료 체계의 현실을 보라”고 당부했다. 내 조언을 귀담아들은 그는 취재 대상의 저변을 파고드는 기자로 성장해 갔다.
2011년 8월 박 기자의 부탁으로 그해 입사한 조건희 기자를 비롯한 동아일보 수습기자 10명을 만났다. 그들은 부서로 배치되기 전 실무교육을 받고 있었다. 강도 높은 교육을 거쳐 치열한 현장의 고단함을 바탕에 깔아야 좋은 기자로 성장할 것이었다. 나는 새내기들에게 일장기를 지운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해 한국 사회의 비루함에 물러서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 와중에 내가 속한 기관은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외상센터에서 제외됐다. 석 선장 치료를 계기로 전국 5곳에 선정된 외상센터나 의료용 헬리콥터 도입 등은 나와 무관하게 됐다. 외상외과를 그만둘 시점만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박혜경 기자(현 동아일보 출판국 파트장)가 나를 찾아왔다. 책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직장생활을 버텨 가는 것도 버거워하던 내게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관점을 알려 주었다.
“교수님께서 진정으로 같이 일해 온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더욱 활자로 남기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는 내게 부서장으로서 남겨야 할 ‘기록’의 가치를 말하고 있었다. 난 큰 깨달음을 얻고 나와 동료의 일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망 없는 분야에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어 희생한 바보 같은 동료들의 이야기들이었다.
지난해 11월 탈북 과정에서 다발성 총상을 입은 북한군 환자가 한동안 이슈가 됐다. 채널A의 사공성근 기자가 2011년의 박 기자처럼 병원에 기거하며 ‘뻗치기’를 하자 나는 그에게 박 기자에게 했던 잔소리를 똑같이 했다. “공부 좀 해라.”
마침내 북한 병사의 상태가 호전돼 군병원으로 이송하는 헬리콥터가 아주대병원 옥상 헬기장에 도착한 순간, 내 시야에는 헬기장의 엘리베이터 기계실에 잠입해 있다가 이송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하고 있던 사공 기자가 보안요원과 군 관계자들에게 발각돼 끌려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북한군 병사와 나를 실은 헬리콥터가 이륙하는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사공 기자가 어떻게 4중, 5중의 보안선을 뚫고 병원 옥상 헬기장까지 접근했는지 난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공 기자가 아무도 모르는 경로와 방법을 동원해 경비망을 뚫고, 한 장면의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보여준 기자로서의 치열한 ‘진정성’에 놀랐다. 앞으로도 이런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공부하고 현장을 누빈다면 몇 년 뒤 자신의 목을 내놓고 일장기를 지운 선배 기자처럼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지령 3만 호를 맞은 동아일보 기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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