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정치 비판 공모’ 일제가 제동… 국내 첫 문예작품 공모로 바꿔
동요 당선작-아이들 함께 실어
“1000호 기념을 맞아 소회가 어찌 한두 개에 그치겠습니까만 저승의 객이 되며, 칼끝의 혼이 되며, 해외의 나그네가 된 동아일보의 벗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어찌 한 방울의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없겠습니까.”
동아일보가 지령 1000호를 맞은 1923년 5월 25일자 1면 사설 마지막 대목을 현대어로 옮긴 것이다. 일제의 보도 통제 속에서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잃거나 해외를 떠도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동아일보는 당시 1000호를 맞아 총독정치 비판 공모, 민족 지도자 투표와 유사한 ‘현대 인물 투표’ 보도를 기획했으나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처음으로 문예작품을 공모했고, 어린이 1000명의 얼굴과 함께 공모에서 당선된 동요를 지면에 실었다.
지령 1만 호는 자유당 정권의 전횡이 심해진 1955년 8월 19일 맞았다. 1면 사설은 동아일보의 역사를 “허위와 억압에 대한 항쟁의 역사”로 규정한 뒤 언론의 공정무사, 언론의 자유, 민중의 교양 역할을 본보의 신조로 다짐했다. 춘곡 고희동 화백이 그린 무궁화 그림과 청전 이상범 화백의 그림이 축화(祝畵)로 지면에 실렸다. 야당 지도자 해공 신익희(1894∼1956)는 축하 휘호를 보내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