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가 서울 관객 100만 명을 최초로 돌파한 기록은 동아일보와 함께 만든 겁니다.”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난 임권택 감독(86·사진)이 거실 한쪽에 쌓여 있는 동아일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1993년 ‘서편제’는 전국에서 350만 명 넘게 관람하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당시 중앙일간지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회면에 ‘우리 것’의 소중함을 일깨운 영화로 서편제를 소개했다. 이 기사는 개봉 직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서편제에 관객이 몰리는 도화선이 됐다.
“학교 선생님들이 서편제를 보라고 권했고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 이어졌어요. 김영삼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도 서편제를 관람하고 제작진과 배우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영화를 밥 먹고 사는 수단으로 여겼는데 그렇게 많은 관객을 만나면서 영화를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서편제는 판소리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기폭제가 됐고, 주인공 송화 역으로 데뷔한 오정해는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해 말 동아일보는 임 감독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임 감독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르는 등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월 동아일보가 수여하는 일민예술상을 받았다. 상금은 5000만 원이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일민예술상 받고 4개월뒤 칸에서 감독상… 어마어마한 해” ▼
“언론사에서 주는 큰 상을 처음 받게 돼 깜짝 놀랐습니다. 동아일보가 어떤 신문입니까. 그 험했던 왜정 때 독립운동을 보도하고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잖아요. 박정희 정권 때 백지 광고 사태를 겪었고요. 그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언론사가 영화감독에게 상을 주다니…. 참 좋았습니다.”
임 감독은 일민예술상이 주목한 그해 5월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감독상을 거머쥔 것이다. 그는 “2002년은 내게 어마어마한 해였다. 돌이켜보면 일민예술상을 받으며 시작한 2002년의 좋은 기운이 칸 영화제까지 이어진 것 같다”며 웃었다.
신군부의 언론사 강제 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이 마지막 방송을 한 1980년 11월 30일 임 감독은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고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1934∼2008)과의 추억도 많다.
“흥이 많으셨던 회장님은 판소리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어요. 서편제를 만들 때 판소리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관심을 가져주셨지요. 큰 힘이 됐습니다.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1기를 회장님과 함께 다니기도 했답니다.”
임 감독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현관문 앞에 놓인 동아일보를 직접 챙겨와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40년 넘게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기사 두루두루 다 봅니다. 아내는 문화 국제 뉴스를 주로 읽어요. 오후에는 손자 지우와 놀고요.(웃음) 매일 신문을 봐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지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며칠 집을 비울 때면 이웃이 동아일보를 모았다가 전해준다. 임 감독이 신문을 열심히 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안 읽은 신문은 다 챙겨 봐요. 종이에 인쇄된 글씨를 읽는 걸 즐깁니다. 책을 살 때도 서점에 가서 손으로 책을 집어 들고 이리 저리 살펴본 다음에 구입해요. 그게 재미니까요. 신문, 책처럼 종이가 지닌 특유의 촉감을 좋아합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우는 임 감독이 신문, 책을 볼 때면 “할아버지 공부하고 계세요”라고 다른 가족에게 말한다. 동아일보에 보도된 임 감독 관련 기사는 모두 스크랩돼 있다.
“여러 신문에 난 기사를 모았는데 동아일보 기사가 진짜 많아요. 동아일보는 영화 사랑이 유별나게 컸다고 할까요.”(웃음)
신문 기사를 비롯해 임 감독이 받은 트로피, 상, 자료 등은 모두 동서대 임권택영화박물관에 있다. 그는 동서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 석좌교수다.
“동아일보는 굵은 물줄기를 이루며 굽이굽이 살아온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신문입니다. 그런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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