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간지러운 ‘원태연 표’ 꼬리, 이젠 떼고 싶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3일 03시 00분


18년만에 시인으로 돌아온 원태연
‘손끝으로 원… 그걸 뺀 만큼 사랑해’ 달달한 시어로 90년대 신드롬
시론 돈 못벌어… 작사-드라마 ‘몰두’ “이 나이에 계속 그런 詩, 웃긴 일”

1990년대를 풍미한 ‘밀리언셀러 연애시인’ 원태연. 거의 20년 만에 독자에게 돌아온 그는 “시 쓰는 법을 다 잊어 걱정이 많았는데 반겨주는 독자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990년대를 풍미한 ‘밀리언셀러 연애시인’ 원태연. 거의 20년 만에 독자에게 돌아온 그는 “시 쓰는 법을 다 잊어 걱정이 많았는데 반겨주는 독자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90년대를 지나온 청춘이었다면 원태연 시인(49)을 모를 수 없다. ‘넌 가끔 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가다 딴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니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등으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국내 시집 판매 1위’의 주인공이다.

그가 18년 만에 구작 70편과 신작 30편을 더한 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냈다. 작사가, 감독, 연예기획사 프로듀서로 변신해 활동하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것.

그는 “작년에 10년 다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해고당했고 올해는 오랜 꿈이었던 드라마 제작까지 엎어지며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돌파구가 절실하던 무렵 필사 시집을 내보자 했던 출판사의 제안이 떠올랐다. 완전히 잊어버린 시 쓰기에 다시 도전한 계기다.

중학생 시절부터 7년간 쓴 시를 묶은 첫 시집은 이름도 없던 작은 출판사에서 인세 계약 대신 매절 계약으로 냈는데 덜컥 베스트셀러가 됐다. 150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정작 그의 손에 들어온 인세는 전무했다. 이후 낸 시집도 인세 정산을 제대로 받은 건 드물어서 정확히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른다. 총 600만 부를 팔았다고 추산되지만 정작 그는 “경제적 기반을 잡는 데는 시집보다는 작사가 활동이 더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백지영 ‘그 여자’, 허각 ‘나를 잊지 말아요’, 태연 ‘쉿’ 등 수많은 히트곡의 작사를 했다.

사격 선수 출신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한 ‘상남자’였던 그가 낯간지러울 정도의 애틋한 연애시의 시인으로 유명해지자 가장 놀란 건 가족이었다. 어머니는 “누가 써주는 거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자아가 어디서 나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며 “쓰다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오글거리고 오싹하다”며 웃었다.

그는 가장 많이 읽힌 시를 썼음에도 문단과 출판계에선 시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개그 프로에선 그의 시가 패러디 단골 소재로 쓰였다. 18년 만에 다시 시를 쓰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고민이 컸다. 마지막 시집 ‘안녕’ 이후 시작을 관둔 것도 대중의 요구에 맞춘 시를 쓰는 데 지쳐서였다. 하지만 작사든, 드라마 극본 작업이든 원태연에게 다들 ‘로맨스’만을 원했다. 밀리언셀러 시인이란 타이틀은 영광이자 굴레였다.

‘내 이야기 같은 절실함’을 불러일으키는 데 탁월한 그는 ‘원태연표’라고 세상이 이름 붙인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 나이에 계속 그렇게 쓰는 것도 웃긴 일”이라고 했다. 다만, 이번 시집은 구작 70편과 20년 만에 새로 쓴 시를 합친 만큼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서 톤을 맞췄다. 그는 “독자들이 보기에 신·구작 간 온도차가 없다면 잘 쓴 것이다. 그래도 묵직한 남자가 쓴 것 같은 시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돌아온 그의 바람은 이제 “근사한 남자가 쓴, 진짜 근사한 시를 쓰는 것”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원태연#시인#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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