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때 바둑판 안고 상경… 15세 입단
본보주최 국수전 6연패 달성
1968년 40연승… 한국기원 최다기록
“승부에만 몰두 않고 품격 보여줘”
‘영원한 국수(國手)’로 불린 한국 바둑계의 거목 김인 9단이 4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국수전에서 6연패를 달성해 ‘김 국수’라는 별칭이 붙었다.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우승한 후 1971년 15기까지 연이어 우승한 것. 2006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일상생활을 이어갔지만 최근 건강이 악화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1943년 전남 강진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열두 살 때 바둑판을 안고 야간열차로 홀로 상경했다. 원로 김봉선과 아마 고수 이학진을 사사한 고인은 15세에 프로 기사로 입단했다. 1962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남철 9단의 소개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에게 배우면서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가 또래 유망주들을 상대로 80% 안팎의 승률을 기록하자 당시 일본 바둑계에는 고인과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대만의 린하이펑(林海峰) 등 세 나라 천재 기사가 주도하는 ‘김죽림(金竹林)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1966년 국수전에서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의 10연패를 저지하며 새로운 바둑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1966년 제1기 왕위전 우승을 시작으로 7연패(통산 8회 우승) 기록을 세웠으며, 1966년 제6기 패왕전 우승 이후 7연패를 달성했다.
1977년까지 30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22개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각박하게 승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평온한 가운데 담백한 철학이 녹아든 중후한 품격의 기풍을 보여준다”는 평판 속에 큰 사랑을 받았다. 일인자 자리를 후배 조훈현 9단에게 넘긴 후에도 상당 기간 바둑전문지의 독자인기투표 상위권을 지켰다.
바둑이 지닌 도(道)의 가치를 고수하고 과정을 중시한 그는 TV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며 끝내 참가하지 않았다. 후배들은 그런 그를 ‘변치 않는 청산(靑山)’이라고 불렀다. 모나지 않은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상금과 대국료로 형편이 어려운 바둑계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많이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63년 동안 프로 통산 전적은 1568전 860승 5무 703패. 1968년에 세운 40연승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한국기원 최다 연승 1위 기록이다. 1967년의 연간 승률 88.1%(37승 1무 5패), 1968년 승률 87.72%(50승 7패)는 각각 역대 3, 4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83년 9단으로 승단했다.
1971∼75년 한국기원 기사회장을 지냈으며, 2004년부터는 한국기원 이사로 활동했다. 2006년 위암 수술을 받은 후에도 그는 중국 등 해외에서 국제 바둑대회가 열리면 늘 한국 대표 선수단의 단장으로 동행했다. 고향 강진군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늦가을에 고인의 이름을 딴 국제 시니어 바둑대회(김인국수배)가 열리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옥규 씨와 아들 산 씨가 있다. 장례는 한국기원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은 6일 오전 9시. 02-2227-7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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