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때 강제 입소된 최영수씨
노역-구타 시달리다 탈출했지만 원래 살던 곳 개발로 가족 못찾아
카센터 직원 눈썰미 덕에 친형 상봉… “지옥 떠올라 수면유도제 달고 살아”
“감자골에 살았던 영열이 형 맞으신가요?”
“아이고 내 동생 영수구나. 어머니가 널 보셨어야 하는데….”
25일 경기 화성시 자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최영수 씨(58)는 “형과 41년 만에 기적적으로 재회한 2016년 8월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형 최영열 씨(59)는 “동생이 선감학원에 끌려간 줄 몰랐던 어머니는 항상 동생 밥을 퍼놓고 기다리셨다”고 돌이켰다.
최 씨는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은 167명 중 한 명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랑아 단속 명목으로 아동·청소년을 강제 수용했고 각종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8남매 중 막내였던 최 씨는 열한 살이던 1975년 8월 선감학원에 끌려갔다. 수원역에서 “화장실 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던 최 씨를 경찰이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고 했다.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했지만 막내를 찾을 순 없었다. 최 씨는 1964년 8월 20일 태어났지만, 선감학원이 원아대장에 1962년 1월 1일로 기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기도 조례상 만 13∼18세 남아만 수용할 수 있다 보니 대장을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 씨는 “매일 보리밥에 건더기도 없는 국물, 김치에 무장아찌만 줬는데 그마저도 3분 만에 먹어야 했다”며 “강제 노역과 구타에 시달리다 8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발각됐다”고 했다. 한 직원은 유리 조각으로 최 씨의 허벅지를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꼬박 버티다 직원이 회의에 간다며 최 씨 등 3명을 데리고 나왔을 때 인파 속에 숨어 탈출했다. 가족을 찾으려 했지만 원래 살던 경기 안산시 상록구는 개발이 진행 중이었고 가족도 다른 곳으로 이사한 뒤였다. 최 씨는 닥치는 대로 신문팔이, 구걸, 식당일 등을 하며 생활했다. 영열 씨는 “2009년 사망한 어머니가 눈감는 순간까지 막내를 찾았다”고 했다.
가족과 수십 년간 생이별해 살던 최 씨는 2016년 8월 단골 카센터 직원 덕분에 극적으로 형과 만날 수 있었다. 눈썰미 좋은 이 직원은 최 씨에게 “당신을 닮은 사람이 차를 수리하러 와 물어보니 동생 이름이 영수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41년 만에 상봉하던 날, 둘은 어릴 적 마을 이름을 같이 되뇌며 형제임을 확인한 뒤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최 씨는 가족을 찾은 직후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41년 만에 어머니 앞에 선 막내는 한없이 흐느끼기만 했다고 한다.
가족이 생겼지만 최 씨는 여전히 수면유도제를 달고 산다. 선감학원에서 보낸 지옥 같은 시간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최 씨는 “큰형과 큰누님은 내가 선감학원에 있었다는 걸 아직 모른다”면서도 “기사를 보고 알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라도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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