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4시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e스포츠팀 담원기아의 연습실.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의 연습을 마친 프로 게이머 데프트(본명 김혁규·26)는 같은 팀 선수들과 모여 한국과 브라질이 맞붙는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을 지켜봤다. 결과는 1-4 패배.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데프트는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와 동갑내기인) 황희찬 등 젊은 선수들이 너무 잘하는 게 보였어요. ‘꺾이지 않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라는 문구는 이번 월드컵 기간에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조별리그 가나와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은 조규성도 ‘중꺾마’ 정신이 선수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데뷔 10년 차로 여러 번 실패를 거듭했던 데프트에서 비롯된 말이다. 10월 데프트가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답변한 것이 ‘중꺾마’로 소개된 후 청년들 사이에서 희망의 단어가 됐다.
데프트는 지난달 5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롤 세계대회(롤드컵) 결승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상대는 데프트의 서울 마포고 동창이자 e스포츠의 ‘레전드’로 불리는 페이커(본명 이상혁). 모두가 페이커가 이끄는 팀 T1의 승리를 예상했다. DRX는 지난해 한국 여름 리그에서 최하위(10위)에 머물렀고 올해 성적도 6위였다. 가까스로 진출한 롤드컵 무대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됐다. 조별리그에서 유럽의 강팀에 패배한 뒤 데프트는 말했다.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것 같아요.”
이 말을 전한 한 인터뷰 기사와 영상 제목에 ‘중꺾마’가 처음 쓰였다. 데프트는 수없이 좌절하고도 도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담아낸 것 같아 자신도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
데프트는 “무너지지 말자”며 DRX 선수들을 다독였다. 지난해 롤드컵 우승팀인 중국 에드워드 게이밍(EDG)을 8강에서 만나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을 때 데프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데프트는 롤드컵에 아예 나가지 못하거나 늘 8강 문턱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8강에서 그 기분을 느껴서 너무 좋았어요.”
데프트는 이번 롤드컵 우승을 두고 “선수들끼리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운 결과”라고 했다. 데프트는 여러 차례의 실패를 통해 ‘과정’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결과를 얻어냈다. 파울루 벤투 축구 대표팀 감독도 후방에서부터 패스를 통해 점유율을 높이는 ‘빌드업 축구’를 이식시키기 위해 4년간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데프트는 최근 담원기아로 팀을 옮겼다. 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또래들이 중꺾마를 주목하는 것을 보며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사회를 향한 희망의 이야기가 많아지는 걸 보면서 좋았습니다. 과정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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