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한 이야기와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학창시절 초중고 모두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았을 정도로 ‘뉴스 앵커’를 꿈꿨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던 대학 시절엔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도 맘껏 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방송국도 마다하지 않고 수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 뉴스 진행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오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입 아나운서’의 첫 임무는 새벽 뉴스였습니다. 오전 1, 2, 3, 4시 뉴스를 진행하는 1년 넘게 낮밤이 바뀌는 삶을 살았습니다. 6년간 사용한 휴가는 고작 나흘. 쉬는 날 없이 뉴스에 나왔던 그가 ‘비정규직 앵커’였다는 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억척스럽다’ ‘악바리 같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버텼던 이유는 이랬습니다. “정규직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언젠가는 인정해줄 줄 알았고 조금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많은 동료들처럼 임신, 출산이라도 하게 되면 퇴사 수순을 밟아야 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보장되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월까지 YTN ‘뉴스가 있는 저녁’을 진행하던 앵커였지만 지금은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으로 활동하는 안귀령 씨(34)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10년 남짓 아나운서로 활동하다 최근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를 만났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방송국 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새롭게 도전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뉴스 앵커 시절(https://youtu.be/E5I4MFI_g4M)과 대변인으로서 정치에 도전한 이야기(https://youtu.be/XRjWOlTFnGY)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꿨던 아나운서
―초등학생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꾸셨다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한 반에 1명씩 방송반을 뽑겠다면서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어요. 1명만 뽑는다고 하니 왠지 해야 할 것 같았죠.(웃음) 저 포함 여러 명이 손들었는데 선생님이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가위바위보에서 이겼고 그 후부터 줄곧 아나운서를 꿈꿨습니다.”
―아나운서 입사 시험을 준비하던 대학생 때는 방송국 규모나 고용 형태도 가리지 않고 경력을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한국낚시방송, KTV, 광주방송…. 채용 공고가 뜨는 대로 지원했어요.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똑똑하고 멋진 친구들을 많이 보거든요. 한 번에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작은 경력이라도 차근차근 쌓으면 저만의 강점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엔 그 전략이 유효했죠. 왜냐하면 아나운서 채용이 점점 경력자를 뽑는 추세로 바뀌었거든요.”
그는 KTV 국민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보조 진행 리포터에도 지원했습니다. 이전 회차를 돌려보며 누구보다 철저하게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리포터가 아닌 프로그램의 메인MC로 발탁됩니다. 안귀령 아나운서의 첫 방송 데뷔였습니다.
―리포터 시험에 응시했는데 메인MC로 발탁된 이유는 뭐였나요?
“아나운서 지망생은 대부분 지원하지 않았고 설사 지원했다고 해도 열심히 공부해온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요. 방송 경력이 없었던 저는 작은 시험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프로그램 이력 공부부터 이전 회차 모니터링까지. 면접 끝나고 담당 PD에게 전화를 받았죠. ‘보조 진행 말고 메인MC를 시키고 싶은데 할 수 있겠냐’고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원고도 직접 써보겠냐’고도 묻더라고요. 그것 역시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리포터가 아닌 메인MC로 발탁된 그는 KTV에서 2014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 7월 재보궐선거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체 TV에서 투표소, 개표소 현장을 연결하는 생방송에 출연합니다. 투·개표 생방송은 현직 아나운서들도 경험하기 힘든 기회인데요. KTV에서 쌓은 경력은 한국낚시방송(2015년), KBC(2016년) 합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뉴스 앵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은 계속됐습니다.
―방송국 최종면접에서 수도 없이 탈락했다고요?
“아나운서 지망생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어요. ‘최종에서 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붙을 때가 됐다’고요. 2016년 한 해 동안 주말마다 전국을 돌면서 아나운서 시험을 봤어요. 강원도 원주부터 제주, 전주, 부산, 울산…. 최종에서 자꾸 미끄러지다보니 나중엔 오기가 생겼어요. 한 번은 부산MBC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는데 인사팀에 전화해서 물어봤죠. 왜 떨어뜨리셨냐고요.(웃음)”
―인사팀에선 탈락 사유를 말해주던가요?
“한창 최종면접에서 많이 떨어질 때였어요. 너무 답답한 거예요. 왜 최종에서 안 되는 걸까. ‘제가 아나운서가 너무 되고 싶어서 그러는데 떨어진 이유를 알려 주세요’라고 하니 인사팀에서 면접관과 연결해주었어요. ‘우리는 이런 이유로 못 뽑았지만 이런 점은 좋았다. 다만 이런 점을 고치면 좋겠다’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죠.”
―간절함과 열의가 넘치셨던 것 같아요.
“YTN 시험 때는 면접 일정과 광주방송 뉴스 시간이 겹치더라고요. 그때도 인사팀에 전화했어요.(웃음) 면접 순서를 제일 뒤로 미뤄주면 안 되냐고 부탁드렸죠. 다행히 순서를 맨 뒤로 바꿔줬고 광주에서 녹화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택시, 비행기, 오토바이를 타고 상암동 YTN에 도착해 무사히 시험을 봤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있잖아요.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 그게 정말 중요해요. 이걸 누군가는 알아주더라고요.”
‘열심을 다하면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믿음을 붙잡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마침내 YTN에 입사합니다. 뉴스 앵커가 된 후 한동안 ‘뉴스에 빠져’ 살게 됩니다. 신입 때는 새벽 뉴스를 진행하느라 오후 9시 출근, 오전 6시 퇴근하는 삶을 반복했습니다.
―낮밤이 바뀌는 생활을 1년 넘게 하셨다고요.
“뉴스를 진행하고 싶었던 제게 YTN은 선망의 회사였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충만했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땐 뉴스 시간에 늦을 까봐 서너 시간 먼저 일찍 도착했어요. 그땐 뉴스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았어요.”
새벽, 낮, 저녁.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며 뉴스 앵커로 살았던 기간은 6년 남짓입니다. 새벽 뉴스를 진행할 땐 낮밤이 바뀌었고 오후 7시에 시작하는 ‘뉴스가 있는 저녁’을 맡았을 때는 아침부터 뉴스를 틀어놓고 하루종일 준비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속보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년간 사용한 휴가는 나흘 뿐이라고 합니다. 온 힘을 다했던 시기였습니다.
정규직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다. 지난 6년 동안 쓴 휴가는 나흘이다. 2019년 여름 사흘, 2021년 여름 하루. 하지만 비정규직이 휴가를 쓰지 않는 것은 억척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살아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버텼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똑같이 일하고도 차별받는 현실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안귀령 SNS)
―6년간 휴가를 4일 밖에 쓰지 못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회사에서 휴가를 쓰지 못하게 한 건 아니에요. 비정규직이었지만 무급 휴가는 쓸 수 있었어요. 다만 휴가도 안 쓰고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줄 거라 생각했고, 조금 더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동기 아나운서가 임신을 하면서 퇴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느니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습니다. 지난해 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캠프 영입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2030 청년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 앵커라는 점이 영입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정치권으로 가면서 많은 비판을 받으셨어요.
“언론사에서 뉴스를 만들어왔기에 정치권에 바로 뛰어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니 부담스러웠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 동료들에게 피해되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래도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군가는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비정규직 앵커, 프리랜서 아나운서였어요. 많은 분들이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비정규직이라는 걸 모르시더라고요.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는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분위기가 점점 굳어지고 있어요. 요즘엔 PD, 작가도 비정규직으로 뽑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여건이 저를 위축되게 만들었어요.”
그가 앵커를 그만두고 정치인의 삶을 선택한 지 어느 덧 1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인은 살아온 삶을 재료 삼아 철학과 비전을 밝히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과 그간 겪었던 차별, 설움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 “‘비정규직 앵커’가 있다는 사실 몰랐을 수도”
이재명 후보의 영입인재로 정치를 시작한 그는 지난해 1월 18일 ‘무급’ 선거 운동을 시작합니다. 첫 행보는 서울 강남역 유세였습니다.
―찬조 연설자로 무대에 섰습니다. 어색하진 않았나요?
“추운 겨울이었는데 단상에서 내려오니 어떤 분이 다가오셨어요. 따뜻한 음료를 주시면서 자신을 취업준비생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했었던 일, 그만두고 당에 들어온 이유를 잘 알고 있다면서 응원한다고 해주셨어요. 너무 뿌듯했습니다.”
―결과는 소속 정당의 패배였어요. ‘애인과 헤어졌을 때보다 후유증이 길었다’고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기분이었어요. 좌절, 슬픔, 패배감…. 이런 걸 다 섞어놨다고 할까요. 바로 떨치고 일어날 수 없겠더라고요. 당에 들어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생각해봤어요. 많은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렸잖아요. 그 목표가 무너진 거였으니까 그렇게 힘들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정치권에 입문하고 나서 한 번도 월급을 못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캠프도 자원봉사 개념이고 정무직 대변인은 급여가 없어요. 회사 다니면서 모아뒀던 돈 쓰고 가끔 방송 출연하면서 버는 용돈으로 생활해요. 청년 정치 어렵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어요.(웃음) 변호사나 교수처럼 전문직 아닌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 일반 청년은 정치에 뛰어들기 힘든 구조예요. 참여 단계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 생기는 거죠. 청년 정치인에 대한 지원은 지금보다 더 확대되어야 해요.”
―돈을 포기하고 정치인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누군가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만약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비정규직 앵커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몰랐을 수 있잖아요. 저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되잖아요. 후회는 없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날(1월 18일)은 그가 정치권에 입문한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1년차 정치인에겐 다소 이르긴 하지만 정치인에게 ‘선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 내년 4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시나요?
“일단 현실 정치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들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게요. 가볼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보고 싶습니다.”
―모든 정치인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하잖아요. 귀령 씨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처음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캠프의 일원으로 경험한 것에 비추어 봤을 때, 후보 당사자로 (선거에서) 뛰면 훨씬 힘들 것 같아요. 얼마나 긴 시간,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준비를 했는지 아니까요. (선거에서 패배한) 상대 후보를 불러서 그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정치인 안귀령’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수·말씨·문필·판단력)을 고루 갖춘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실 수 있게 열심히 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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