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前 아사히신문 기자
100주년 해에 진상 밝힌 책 내
“일본 우익 정당방위론 성립 안돼”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통신과 교통이 모두 단절된 환경에서 제작된 오보가 오늘날 간토대지진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가 긴 시간 동안 정정되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던 탓입니다.”
최근 신간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삼인)을 펴낸 전 아사히신문 역사전문기자 와타나베 노부유키 씨(68)가 1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직후 요코하마 등지에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살해된 조선인은 약 6000명에서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우익단체들은 조선인 학살 사건을 두고 조선인이 벌인 방화·봉기 등 범죄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내용의 ‘학살부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와타나베 씨는 신간에서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옛 신문 기사가 오보였음을 밝혔다. ‘조선인 폭도들의 방화 및 봉기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1923년 9월 3, 4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해당 기사에는 ‘고베의 모 무선전신으로 감청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인용 출처가 드러나는데, 이미 9월 1일 밤부터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와 봉기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뒤였다.
와타나베 씨는 아사히신문 사사(社史)를 토대로 이 기사가 쓰인 과정을 역추적했다. 그 결과 지진 발생 직후 오사카 현장으로 급파된 기자들은 4일 무렵 현장에 도착했고, 감청 정보의 팩트 체크를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당일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와타나베 씨는 “당시 보도된 기사는 확인되지 않은 오보였다”며 “‘조선인 학살 사건은 봉기를 일으킨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란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간토대지진 직후 내무대신을 지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1923년 11월 15일 조사를 토대로 남긴 ‘지진 후 형사사범 관련 사항 조사서’에 따르면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저지른 살상 사건은 5건으로 기록돼 있으나 피의자와 피해자 신원 모두 미상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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