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영국서 쓰러져 국내 이송… 악성 뇌종양으로 20시간 수술받아
지난달 손숙 연극에 5분 우정 출연… “고난은 삶의 소중함 알려준 축복”
“빗물이 한옥 처마를 타고 흘러내릴 때 얼마나 예쁜지 알아요? 하늘이시여, 더 세찬 비를 내려주오. 부디 제게 더 멋진 정취를 안겨달란 말이에요.”
비가 추적이던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옥에서 만난 배우 윤석화 씨(67)의 말이다. 인터뷰를 위한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조금 지쳐 보이던 눈꺼풀과 동그라니 말려 있던 어깨는 활시위를 당긴 듯 활짝 열렸다. 허공으로 던지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잘 쓴 극본의 대사처럼 들렸다. 암 투병 소식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그저 반백 년 가까이 무대에서 살아온 천생 배우다웠다.
윤 씨는 배우 손숙, 박정자 씨와 함께 국내 연극계를 이끈 여성 연극인으로 손꼽힌다. 1975년 민중극단의 연극 ‘꿀맛’으로 데뷔해 뮤지컬 ‘명성황후’(1996년)에서 제1대 명성황후를 맡았고, 연극 ‘신의 아그네스’(1999년)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음악전문지 ‘월간 객석’을 인수해 종합예술지로 발행하고, 2002년 설치극장 ‘정미소’를 세워 17년간 운영하는 등 공연계에 애정을 쏟았다.
지난해 8월,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영국 런던 출장길에서 급작스럽게 쓰러져 에어앰뷸런스로 서울로 이송된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악성 뇌종양. 2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버텨낸 그 앞에 남겨진 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이었다.
“아침마다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찌르면 괴성을 질렀고 항암 치료를 견디기엔 내 몸이 역부족이었어요. 주치의와 의논해 항암 치료를 일시 중단하고 통원 치료를 받기로 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로 꼽아요. 한 달을 살더라도 윤석화답게,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다달이 받는 추적검사에서 그는 의사가 놀랄 만큼 호전 중이다. 올 6월부턴 일상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지난달엔 손숙의 데뷔 60주년 기념 연극인 ‘토카타’에 외롭게 앉아 있는 노인 역할로 5분간 깜짝 출연해 화제가 됐다. 개막 일주일 전, 박정자 씨로부터 “숙이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을 함께 장식해주자”는 연락이 온 게 계기가 됐다. 그는 “무대는 오를 때마다 살 떨린다”며 “행여 넘어지기라도 해서 귀한 공연을 망칠까 걱정했지만 잘 해내 다행이었다”고 고백했다.
내년쯤엔 다시 연극 무대에 서길 희망하고 있다. 그는 “연극을 할 때 비로소 에너지가 생긴다. 건강 상태를 보며 최근 들어온 제안을 검토 중”이라며 “내 모든 걸 아낌없이 주고 싶은 관객들과 다시 마주하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훗날 완전히 건강을 되찾는다면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올리는 것이 그의 꿈이다.
다시 무대에 올려보고 싶은 작품으로는 1998년 출연한 연극 ‘마스터 클래스’를 꼽았다. 윤석화는 이 작품에서 전설적인 오페라 디바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은퇴 이후 삶을 연기했다. 그는 “무대를 향한 칼라스의 치열함에서 내가 보여 애착이 크다. 다른 누구보다 진심을 담아 연기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18년 뒤인 2016년에도 같은 공연을 올렸다. 당시 개막 전 교통사고로 갈비뼈 6대가 부러졌지만 휠체어 투혼으로 관객과 약속을 지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인생에 자꾸만 들이닥치는 굴곡이 원망스럽진 않을까.
“고난이 축복이라고 믿어요. 아픔의 시간이 없었다면 삶의 소중한 페이지들을 죄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생을 연극배우로 살 수 있어서, 뒤늦게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해, 고마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시간이 주어져서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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