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哲 기자」 「53년5월 육군장교로 입대, 58년3월 대위로 예편」.
孔魯明전외무장관의 공식적인 군복무이력이다. 그러나 孔전장관은 6.25전쟁이 일어난 50년7월부터 9월까지 인민군 생활을 했다.
그는 장관재임 당시 주위사람들에게 인민군에 강제징집됐었던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孔전장관으로부터 「끌려갔다 탈출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고 전했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에 孔전장관은 「인민군으로 80일, 국군장교로 5년」이라는 남다른 군경력을 갖게 된 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孔전장관의 인민군 강제징집 경위는 그가 경기공립중(현 경기고) 5학년에 재학중이던 50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경기공립중 정문에는 「일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제적시키겠다」는 게시문이 나붙었다. 이를 보고 하나둘씩 정문에 들어서는 학생들을 인민군은 따발총으로 위협, 대강당에 몰아넣었다. 인민군에 의해 한남국민학교(당시)로 끌려간 학생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평양 제3고등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대대인 인민군 105연대 15대대로 편성됐다.
군복을 지급받은 학생들은 개성의 선죽국민학교에서 3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그후 「학생인민군」들은 20여일의 행군을 거쳐 전남 영광 함평지역에서 해안경비임무를 맡았다. 孔전장관이 속한 82㎜ 박격포중대에만 10여명의 경기공립중 학생들이 배속됐었다는 것이 당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15대대가 후퇴명령을 받은 것은 50년9월29일. 그러나 북으로 향하던 인민군들은 전북 변산반도를 통해 상륙한 미군부대의 기습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孔전장관도 전남 장성으로 몸을 피해 80일간의 인민군생활을 끝내게 됐다. 함북 명천이 고향인 孔전장관의 아버지는 당시 장성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孔전장관은 복학해 51년8월 경기공립중을 졸업한 뒤 그해 9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이어 법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53년 휴전회담직전의 치열한 전황속에서 그는 육군소위로 자원입대, 통역장교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