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哲熙기자」 우리 정치사에서 국민회의의 金大中(김대중)총재와 金相賢(김상현)지도위의장 만큼 애(愛)와 증(憎)이 얽히고 설킨 관계도 흔치 않다. 열두살 차이로 고향도 같은 전남인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는 40년도 훨씬 넘는다.
김의장의 고교 재학시절 웅변관계 일을 인연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곧바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됐다.
말솜씨는 물론 타고난 정치수완까지 「닮은 꼴」인 두 사람은 65년 6대 국회에 나란히 진출했다. 아호도 후광(後廣·김총재) 후농(後農·김의장) 등 같은 「후(後)」자 돌림으로 지었다. 70년 후광이 신민당 대통령후보경선에 나섰을 때 후농은 현역으로는 유일하게 선거참모로 나섰다.
그후 유신 5.18 5공 등 강압통치아래에서도 두 사람은 투옥 고문 정치규제를 겪으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갔다. 후농은 80년대 초반과 중반, 미국 망명중이던 후광의 「국내대리인」으로 金泳三(김영삼)대통령과 함께 민추협을 창설해 공동의장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후광이 귀국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 신민당 운영문제를 놓고 후농이 후광의 뜻을 거스르자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이후 87년 대선을 앞두고 급기야 동교동은 후농에게 「출입금지」조치를 내리기에 이르렀고 후광이 평민당을 창당하자 후농은 『명분없는 분당』이라고 비난하며 김영삼진영(통일민주당)에 남았다.
그러나 13대 때 낙선한 후농은 동교동을 노크했고 후광은 다시 받아들였다. 이어 92년 후광이 대선패배후 정계를 은퇴하자 후농은 두차례나 민주당 당권도전에 나서는 등 후광이 떠난 「공백 차지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 해 후광의 정계복귀와 국민회의 창당 때 후농은 막바지에 합류해 곧바로 후광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고운 정」은 모두 사라지고 「미운 정」만 남은 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